"운동권 남자들 조심해. 걔네가 젤 무섭다 너."
결혼행진곡으로 <바위처럼>을 선택한, 너무나도 운동권스럽던 내 결혼식에서 똥숙이모가 건넨 말이다. 저 말, 왜 안 들어봤겠는가. 크면서 엄마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다. 성인이 되고 학생회며, 집회며, 대외 활동이며 뭐든 열심인 내게 우리 엄마는 늘 말했다. "운동권 남자들 조심해." 그런데 아뿔싸. 운동권 남자를 딱 골라서 결혼을 해버린 거다. 원체 청개구리 기질이라, 운동권 남자 만나지 말란 말 대신 "운동권 남자 만나 결혼해"라는 말을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으면 좀 달랐을까. 활동가 엄마를 둔 덕에, 나는 우리 아빠를 포함해 수많은 운동권 남자 어른들을 보고 자랐다. 뭣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저런 남자는 절대 안 만나야지'했었는데, 왜 나는 수많은 선배 운동권 여자들과 같은 '실수'를 했던 걸까.
우리 엄마는 이십 대 초반부터 운동권이었고, 노동 운동판에 뛰어들어 열심히 공장 내 조직 활동을 하다가 88 올림픽의 여파로 철거민이 되었다. 그때부턴 또 철거민이 되어 생존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연대 활동을 펼치던 전대협 학생과 사랑에 빠지고 만 거다. 그게 우리 엄마와 아빠가 만난 이야기다. 이들의 만남이 얼마나 뜨거웠을지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 팔다리가 덜덜 떨리는 싸움을 해야 할 때, 같이 손 잡아주는 이의 등장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운동의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나타났다고 느낀 순간,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다. 힘든 투쟁을 이어가는 하루의 끝에 온전히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삶의 원동력이 될 거라 믿지 않았을까. 그들이 함께 활동을 하며, 데이트를 하며 정의와 평화와 평등을 주제로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그들이 웨딩 마치를 올리고 난 뒤의 이야기는 나도 아주 잘 아는 이야기다. 빨간 줄이 긁혀 군대도 가지 '못'한 우리 아빠는 꿈꾸던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 그 시절 386 남자들의 뻔한 루트였던 국회 보좌진 자리는 왜 인지 거절하고,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실직. 내 기억 속 아빠는 집 한 구석에 누워있는 모습이 더 많았다.
엄마는 애기방에서 일했다. 일하는 여자들의 애기들을 돌보기 위해 지역의 여자들과 선교사들이 함께 만든 애기방이었다.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여섯 시. 종종 일곱 시까지. 동네 여자들의 애기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 엄마는 그 여자들의 출근 시간 전부터 퇴근 시간 이후까지 애기방을 지켜야 했다. 퇴근하고 나면 저녁 시간. 아빠는 여전히 누워있다. 퇴근이 늦어 저녁 준비를 부탁한 엄마에게 아빠는, "내가 밥 해 먹으려면 결혼을 왜 했냐"는 '세기의 망언'을 날렸다. 이밖에도 에피소드는 무수히 많다. 임신한 엄마에게 밥상을 던진 얘기, 아파서 끙끙거리는 나에게 시끄럽다며 소리를 지른 얘기, 오랜 생활고에도 구직을 하지 않았던 얘기,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엔 손도 대지 않은 얘기. 듣기도 많이 듣고, 겪기도 많이 겪은 이야기들이다.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면서 이런 일상의 폭력과 방임은 끝이 났지만, 아빠와 딸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혈연관계는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엄마랑 아빠의 이야기는 내가 살던 동네에선 별 특별한 케이스도 아니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봉천동에는 빈민운동, 지역운동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엄마의 일터에서, 엄마가 퇴근하고 참여하던 지역 정당 회의에서, 엄마를 따라간 지역 활동가 야유회에서 만난 어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엄마의 사회생활을 통해 본 성별 분업의 패턴은 선명했다. 일단 한 번 말을 꺼냈다 하면 말이 길어지는 건 아저씨들이었다. 긴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때가 되면 부엌으로 향해 다과와 식사를 준비하는 건 아줌마들이었고, 빙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 나와 내 친구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사람들 또한 아줌마들이었다. 바람을 피워서 집안을 초토화시키거나, 부부 싸움을 하다가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폭력을 휘두른 아저씨들, 집안 살림은 나몰라라한 채 바깥 일만 신경 쓰고 다니던 아저씨, 그리고 우리 엄마를 성희롱했던 아저씨. 이런 사람들이 내가 기억하는 운동권 아저씨들이었다. 그랬던 아저씨들이 유명 시사 방송에 패널로 나오거나, 존경받는 예술가로 활동할 때, 나는 그 집에 같이 살던 여자들과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그 여자들과 어린이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이 운동권이었다는 사실만 빼면, 한국 사회 가부장의 보편적 모습이다. 그렇지만 내가 배신감을 느끼는 건 이들의 입에서 분명 정의나 평등 같은 아름다운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거다. 말이나 못 하면 진짜.
엄마보다 30년 늦게 태어난 나라고 해서 별로 다른 환경이었던 건 아니다. 농활에서 겪었던 성폭력 사건, 학생회 내 성희롱, 조직 내 젠더 폭력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을 통해서도 무수히 많은 운동권 가부장 남성들을 만났다. 반바지를 입고 다니지 말라던가, 처장 눈치가 쎄하니 출근해서 바나나를 먹지 말라던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들었고, 운동권 남자와 결혼해서는 온갖 가사 노동이 다 내 차지였다. 봉천동 아저씨들을 보며 자랐으면서도, 그게 왜 내 일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던 건지 땅을 치고 후회했다.
치를 떨었던 건 이들이 운동 사회의 동료들이란 사실. 함께 나눴던 뜨거운 토론과 광장에서 손잡고 흘렸던 눈물이 아직도 생생한데, 내 일상에서의 그들은 왜 권력자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늘어놓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나와 같이 퀴퍼에서 눈물 흘렸던 그 남자는 왜 나의 독박 가사노동에,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위험에 눈물 흘리지 않는 걸까. 그런 눈물에는 누구도 박수 쳐주지 않아서 일까. 엄마를 비롯해, 운동권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이 사무치게 억울한 게 이런 거 아니었을까. 너무 배신감이 들어서 운동까지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결혼을 그만두고 나서 보니, 운동권 남자들과는 왜 운동권 여자들과 비슷한 농도의 연대와 유대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심각한 고민이 든다. 일단 나랑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볼 때면, '한 일주일만 몸을 바꿔서 살아보고 싶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미워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동경하는 마음이다. 남성 동료들과도 동등하게 안전해보고 싶다. 안전을 위협받을 걱정 없이, 내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긴장 없이 활동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정말 궁금하다.
내가 사랑한, 내가 함께 일한, 내가 함께 살았던 운동권 남자들을 돌아본다. 그들과 동등한 인격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내가 일상 투쟁에 실패했던 걸까. 일상이 물론 투쟁이 맞지만, 한 번이라도 긴장 없이 편히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 그들과. 동료로서, 동등한 인격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