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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화 May 08. 2024

어머니의 시

   


 어머니는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평소 건강하던 분이었지만 말년에 기억을 잃어, 나름의 질서 속에 살아가던 자식들 삶에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행동 중 하나는 서울 사는 우리 집을 자주 방문하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남편의 대한민국정부 방위산업프로젝트 참여 차 미국주재원으로 나가 살다, 자의반 타의반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고국에 돌아오니 방위산업은 사양길이어서 남편은 대학교수로의 이직을 꿈꾸며 방 2칸, 넓지 않은 거실의 반 지하 월세 집을 1년 임시 계약했다. 교수로 자리 잡으면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생각이었다.

 

 좁은 집안에 풀지 않은 짐 박스들이 안방, 아들방, 거실 빈 귀퉁이마다 켜켜이 쌓여있었다.

이런 집에 엄마가 자주 오시니 대략난감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창 젊은 나이, 여성은 이성이 본능을 이기기도 하지만 남자라는 동물은 본능이 이성을 지배할 수 없을 때가 많아, 혈기왕성한 짐승(?)에게 장모의 방문은 그 자체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학교수의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본인의 이력, 능력, 논문편수 등으로 금방 대학교수가 될 줄 알고 다리에 쥐가 나도록 논문 보따리 들고 대학들을 찾아다녔으나, 인맥ㆍ학맥ㆍ금전 등, 온갖 끄나풀들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세상을 경험하는 일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먹고 사는 일을 등한시 할 수 없어 결국 대기업 연구실에 취직했다.     

 

 말뚝에 매인 생활이 본인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사업으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며 은행지분이 3분의 2인 허름한 상가주택을 무리하게 매입했다.



 한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동짓달 무렵이었다. 다녀가신 지 채 한 달도 안 된 어머니가  다시 방문했다. 이사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아, 예전 집으로 가신 어머니를 데려오는 동안 속에서 감정이 끓어올랐다.

 심적 경제적으로 피폐한 때, 다시 올라오신 어머니가 여간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웠다.

 남편에게 민망하고 부끄러워 어머니를 몰래 불러 서운한 말을 뱉었다.

 “엄마, 우리 상황이 좋지 않아요. 시어머니 돌아가신지 얼마 안 돼 시댁 신경써야하고… 김서방 하는 일도 순조롭지 않아…이렇게 자주 오시면….”

 “….”

 어머니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모르는 체, 나는 집안일로 부산을 떨었다.


 어머니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어머니께 쏘아붙인 말이 스스로의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듯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항상 젊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너무 연로하셔서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나이 어언 80대 초반, 나와 같이 살 날이 10 년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남은 세월 지극정성으로 효도하리라 다짐했었다.

 “그게 불과 얼마나 됐다고…우리는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는 젊은 나이…미국에서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면서…효도할 때까지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모르고….”

    

  어머니께 말도 없이 슬그머니 시장으로 향했다. 좋아하시는 찬들로 저녁 상 차려 만회할 생각이었다.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시장을 몇 바퀴 돌며 어머니 좋아하시는 멍게, 해삼, 각종 나물 등을 바라바리 사들고 왔다.

 집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셨지?’

 이 방 저 방 둘러봐도 어머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시 남편은 1층 상가 한 쪽에서 연구실을 꾸미느라 끼니 때가 돼야 집으로 올라오곤 했다. 후다닥 뛰어 내려가 물으니 모른단다.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어머니에겐 익숙치 않은 환경이었다.

 미친 듯 주변 공원과 한강고수분지 등을 뛰어다녔지만 어머니를 발견할 수 없었다.


 딸년의 모진 말을 견딜 수 없어 내려가셨나 싶어 풀린 다리로 대구 사는 언니 오빠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시골까지 갈 교통편은 없었기에, 대구에서 하룻밤 묵어야 한다는 동선이 훤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또 너거 집에 갔더나? 아직 국내 적응하지 못해 살기 팍팍하다고 가지 마라 몇 번 일렀는데, 아무래도 요즘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어머니가 아닌 듯….”

 

늦은 밤이 되도록 친정 단톡방은 불이 났다.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아서였다.

순간, 머리에 번개 같은 섬광이 일었다.



 평소 어머니는 서울에 오시면 나와 함께 봉은사, 길상사 등, 서울에 있는 사찰들을 다니기를 좋아하셨다. 처음 몇 번은 좋았지만 내 삶에 여유가 없어지며 점점 귀찮아졌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다녀오시곤 했다.  부랴부랴 어머니가 다니던 사찰들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허둥지둥 집 가까운 산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차를 몰았다. 언젠가 어머니와 한강 다리를 걸어 간 적 있었기 때문이다.      


 한밤 느닷없는 젊은 부부의 등장에 절 관계자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투덜댔다.

 “밤에는 법당 문 잠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녀가신 흔적이라도 있는지 근무자들에게 좀 물어봐 주시면 안될까요?”

 관계자는 여간 귀찮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느 방문을 노크했다. 잠시 후 부스스한 얼굴의 남자가 눈을 비비며 나와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법당 문 잠글 때 누가 옷을 벗어놓고 간 것 같기도 하고….”

 부리나케 직원들과 대웅전 법당으로 뛰어갔다.

 “맙소사!”


속 알맹이 자식에게 다 내어준,

차디찬 상강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빈껍데기 가죽,

어머니였다.

   

 며칠 후, 대구로 내려가신 어머니를 언니 오빠들이 병원에 모시고 갔다.

 병원에서 어머니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10 년째,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죄업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긴 숨으로 고향 하늘 바라보며, 불효를 읊조립니다.

  

어머니의 위대함은 가엾음에 있다

이 시의 첫 줄을 써 놓고

한 시절을 보내고

이제 이렇게 풀어나간다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천둥과 번개를 침묵으로 만들어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살았다     

그. 리. 고.

고층 아파트에서 혼자 죽었다     

한 남자가 짐승처럼 등을 구부리고

판을 지고 내려왔다

술 냄새 짙게 풍기며 고꾸라질 듯

층계를 내려오는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슬픈 등     

그 무량겁(無量劫)의 곡선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생애의 울음을 멈추어 버렸다     

비로소 신의 손을 잡을 일밖에 없는

마지막 낮은 인간의 등     

어머니는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해

시 대신 보여 준 끝 장면은 이것이었다  

   

어머니의 시: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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