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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나 Dec 26. 2020

[Netflix] 산타 할아버지, 올해도 와주시나요?

코로나 시대의 울보 어른에게 건네는 98분의 선물 보따리


  누구나 궁금해했던 시절이 있다.


  산타 할아버지는  정말 하늘을 나는 마법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시나요? 엄청 뚱뚱한데 어떻게 굴뚝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쿠키와 우유를 좋아하시나요? 착한 아이 명단과 말썽꾸러기 명단이 정말 있나요?




크리스마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지낸 따스한 무언가.
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설명




  코로나 시대의 어느 날처럼 밤새 드라마를 보며 뜨개질을 하다가 친구에게 온 전화로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 그럼 뭐해, 나는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나 보는 걸.

이렇게까지 크리스마스 같지 않은 연말은 처음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우리 집 늙은 개와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제과점에 들렀다. 거리에는 사람도 없고 크리스마스트리도 없었으며 캐럴도 울려 퍼지지 않았지만 케이크 진열대만은 크리스마스였다.

  산타 얼굴 모양이 그려진 그저 그런 퍽퍽하고 작은 케이크를 하나 샀다. 책상 위에 케이크를 통으로 올려놓고, 포크 하나와 캔 맥주 하나를 세팅한 뒤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 줄 영화를 열심히 찾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절기도 아닌데, 그동안 한국 사람들 크리스마스에 정말 진심이었구나.






  원래 나는 감정 이입을 과도하게 하는 편이라 (과몰입의 의인화 같은 사람이 바로 나다.) 해피 엔딩이 아니거나 눈물 포인트가 많은 드라마나 영화는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넷플릭스 홈 화면은 개그 장르로 분류되는 짧은 애니메이션, 판타지, 액션 장르들로만 가득하다. 

  보고는 싶은데 감정 소모가 싫어 나중에 봐야지, 하고 찜만 해놓은 영화 속에서 [클라우스]를 발견했다. 적어도 몇십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낸 우리는 제목과 영화 포스터만 보면 안다. 풍성한 흰 수염이 난 커다란 덩치의 할아버지, 그리고 클라우스라는 이름.


영화 [클라우스] 포스터


  설명하자면 간단한 이야기의 이 영화는 짧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편지예요. 요즘 편지는 많이 안 쓰죠?
하지만 절대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죠.
빨간 옷 입은 뚱뚱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고 약속대로 착하게 지내면
대부분은 장난감을 받게 된다는 거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더군요.
이 이야기는 편지에 관한 겁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우정 사업 본부장의 아들인 우체국 사관학교의 문제아 제스퍼.

상류층의 아들로 태어나 실크 침대에서 개인 집사가 가져다주는 캐비어나 먹으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아들을 지켜보다 못한 아버지는 그를 우체부로 발령한다. 어디로?

  스미어렌스버그로.


  스미어렌스버그에서 1년 동안 6,000통의 편지가 발송된다면 돌아올 수 있게 해 주겠다-아니면 상속이고 뭐고 꿈도 꾸지 말라는 협박-는 말에 제스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말 한 마리가 달린 낡은 마차를 타고 스미어렌스버그로 향한다.


스미어렌스버그의 첫인상

  개고생 해서 왔는데 이게 뭐야. 집집마다 쇠창살과 작살이 꽂혀있고, 불빛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마을에 도착한 제스퍼는 환영 인사를 해준다는 사공의 말에 속아 마을 한가운데 있는 종을 울렸고, 온 마을 사람들-새총을 든 아이들까지-이 뛰쳐나와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원한과 경멸, 증오로 점철된 두 가문의 오래된 싸움. 서로를 너무나도 싫어한 나머지 아이들끼리도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아 학교도 보내지 않는 마을. 

  다 무너져가는 우체국에 도착해 문을 열어보지만 편지함에는 닭들이 자리 잡고 있고,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제대로 된 호텔로 빨리 데려가 달라고 큰 소리 쳐보지만 어림도 없지.


  다음 날, 하루라도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은 제스퍼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루 종일 뒤져보아도 텅 빈 우체통에서는 썩은 내까지 난다.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혹시 보낼 편지 없냐고 물어보지만 이 미친 동네는 옆 집에서 말려놓는 이불에 구정물을 뿌리고, 아저씨는 길 가다 화분을 맞고, 다 녹이 슨 악기로 서로의 집 앞에서 소음 대결을 한다.

  덕분에 제스퍼는 죽을 맛이다. 편지가 없어도 의사소통-대부분 대포알, 작살, 욕설 같은 것들-이 제대로 되고 있는 마을 사람들 덕분에.


클라우스씨에게 편지를 보내면 장난감을 보내준다고 그랬어요!


불쌍한 제스퍼

  우연히 마을 아이의 그림을 주운 제스퍼는 우푯값을 주면 편지로 부쳐 돌려주겠다고 입을 털어보지만 실패. 스미어렌스버그에서 유일하게 가보지 않은 산 꼭대기의 오두막으로 가보기로 한다.

  텅 빈 오두막의 창고에는 온갖 종류의 장난감들이 먼지만 쌓인 채 방치되어 있고, 허탕이라 생각해 나가려던 제스퍼 앞에 나타난 도끼를 든 커다란 남자.


창고에 쌓여있는 장난감들

  도망친 제스퍼가 흘린 가방에서 떨어진 마을 아이의 그림을 보게 된 남자는 클라우스를 찾아가 아이의 집에 선물 배달을 부탁한다.

  아이들은 선물을 받기 위해 편지를 쓰고, 편지를 쓰기 위해 아무도 다니지 않던 학교에 가기 시작하고, 착한 아이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마을을 바꿔놓기 시작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학교에 혼자 남아 생선이나 팔며 돈을 모아 마을을 떠날 생각이던 교사 엘바는 편지를 쓰기 위해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한다. 건물 안에 잔뜩 걸려있던 썩은 생선들은 아이들의 그림으로 바뀌어 달리고, 엘바가 모아놓은 도주 자금(!)은 아이들의 공책과 연필이 된다.

  

방치되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이름 쓰는 법을 배우고 즐거워하는 장면. 사실 이 장면부터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이웃집과의 사이를 막는 망가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려다 넘어진 옆집 아저씨의 다리에 붕대를 감아주고, 베리를 따서 옆집 아주머니네 집 앞에 두고-아주머니는 잼을 만들어 갖다 주고, 잼을 받은 엄마는 다시 파이를 만들어 돌려준다. 흥!이라고 하면서- 아빠의 녹슨 클라리넷도 반짝반짝하게 닦는다. 아빠는 서로의 집 앞에서 소음 대결을 하는 대신 멋들어진 음악을 연주한다.

  우체국에는 우편물이 쌓이기 시작하고, 선생님은 모아두었던 돈을 계속 꺼내 책과 새 지구본을 산다. 베리 파이를 가져온 아주머니는 이웃집에 초대받고 이웃집과의 사이를 막던 울타리는 부서진다.



선한 행동은 또 다른 선한 행동을 낳는 법.



  클라우스가 아는 어떤 사람이 했다던 말이고, 이 영화의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너무 이상주의적인 말 아니냐고?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누구나 이상주의자였던 시절이 있는 법이다.

  이 말을 처음 들은 제스퍼는 '저는 이 마을에 와서 누구나 뭔가를 얻으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선의와 평화는 확실히 아닐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아이들도 선물을 얻기 위해 편지를 쓰고 착한 일을 하며, 자신도 이 마을에서 떠나기 위해 클라우스를 설득해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은 또 다른 선한 행동을 낳는 법.

  하지만 마을 끝에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고성과 소음 대신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썩은 생선으로 가득 찼던 학교에 아이들이 가득 찬다. 전쟁을 의미하는 종이 있던 마을 광장에 예쁜 전구가 달리고, 사람들은 마주치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다. 아내를 잃고 스스로를 오두막에 가두었던 클라우스의 헛간에는 친구들이 모여 춤을 추고, 텅 빈 선반은 새로운 인형으로 가득 찬다.


  아무도 혼자가 아니게 된다.

  아무와도 싸우지 않아도 된다.









영화 속 내 최애 마르구♥




  물론 이야기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인생에는 큰 갈등과 오해, 이기심, 실망 등이 아주 큰 존재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법이니까.


  그래도, 크리스마스다.


  확신에 가득 찬 해피 엔딩은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사실 살다 보면 쥐꼬리만 한 월급, 깜깜하기만 한 미래, 답답한 인간관계, 후회스러운 지나간 실수에 연연할 수밖에 없지만 낭만과 이상을 꿈꾸는 시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반도 채 먹지 못한 그저 그런 퍽퍽한 산타 케이크와, 미지근하게 식은 맥주를 치우다가 우리 집 늙은 개를 한 번 꽉 안아주었다. 자다 봉변당한 늙은 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한 번 핥아주었고, 나는 친구들과 파티를 하며 보냈던 이제까지의 크리스마스보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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