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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18. 2021

도시의 당신에게

이 글을 읽고 있을 들꽃 같은 당신

이 도시에서 버티느라 애쓰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취업준비를 하던 대학 4학년 시절, 면접 준비를 하러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서류와 인적성을 합격 후 면접만을 남겨놓은 곳들에 이메일을 보내고 방문하면 안 되겠냐며 발칙하게 묻던 그 시절의 패기와 치기..
실무자를 만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추억의 273 버스, 내 대학생활의 희로애락을 태우고 달린 파란 버스.
아마도 서울시내 웬만한 대학을 흝고 지나가는 노선이어서 유독 대학생들이 많이 타는 버스였다.
그날, 돌아가는 만원 버스 안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누구도 나에게 질책하지 않았고, 내 계획과 생각대로 하루를 마친 날이었다.
왜 였을까.

면접을 앞둔 회사문을 나왔을 때, 종로의 크고 웅장한 빌딩들이 나를 향해 무너지는 듯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

나는 아무것도 아녔구나를 깨닫게 된 순간, 그리고 밥벌이의 고단함을 피부로 느끼게 된 순간 두려움을 마주했다. 그리고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보내기까지, 두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킨 내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몰려오는 그런 순간이었다.

고단한 서울생활은 늘 버겁고 속상한 일 투성이었다.
밥 먹고 물을 마시는 기본적인 것부터 양치를 하기 위해 치약을 사야 하는 이런 사소한 행위들이 나에게는 제약이었다. 

비싼 서울 하숙비와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가계부를 쓰고 돈을 아끼고 궁상을 떨었다. 원래가 서울이 고향인 친구들 앞에서는 티 내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안절부절 내가 가진 경제적 빈약을 내보이기 싫어 태연한 척 애썼던 순간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땐 그랬다.

경주에서 상경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대학은 달랐지만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했다.
마침 내가 공부하던 단과대는 오히려 학교 정문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친구의 대학 후문과 가까워서 점심시간엔 친구네 학생식당에 가서 밥을 먹곤 했다. 나중엔 너무 친한 사이가 되어서 하숙방을 합쳐서 쓰기로 했다.

룸메이트 생활을 하는 내내 우리는 늘 함께였다. 그 친구가 있어서 어찌나 든든하고 고맙던지 지금도 내 평생의 지우(知友)이다.
단 한 번도 싸운 적도 없고, 밤엔 동대문 야시장에 가서 허벅지가 날씬해 보이는 요술 바지를 찾았다며 깔깔거리던 우리.
집으로 돌아와선 야식으로 보쌈을 시켜먹고 잠들고, 점심시간엔 학생식당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저녁엔 같이 TV 드라마를 보았다.

그때 당시 나는 학과 내 속한 학회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어찌나 씩씩하고 당돌했던지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갑자기 아찔해진다.
엠티 땐 엠티 조장을 맡아서 선후배들과 끝도 없이 술을 마시고, 새내기 엠티 땐 조별 장기자랑에 나가기도 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여름방학엔 “비가 오면 술 마시는 사람들”의 모임인 우주인(雨酒人)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래서 늘 아침 9시 수업을 1년 동안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나와는 대조적으로 성실하고 술 못 마시는 내 친구는 매사에 열심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잠깐 새벽녘에 눈을 뜨면, 친구는 새벽 5시 즈음 조용히 스탠드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훗날, 본인의 전공을 살려 번역일도 하고 교환학생을 가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안심했다. 스탠드  불빛은  잠자는데 방해되는 성가심이 아니고 친구가 이 새벽 끝에도 내 곁에 함께한다는 안도감과 자랑스러움.. 그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어떠했는가.
내가 친구보다 주로 먼저 퇴근을 했다. 남자 친구를 기다리듯 친구의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가 명동에서 우리만의 맛집, 김치볶음밥을 먹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명동 바닥을 쏘다니다가 같이 273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우리의 20대는 즐거웠고 같은 고민을 나누며 울기도, 좌절하기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렇게 30대를 맞이할 줄 알았다.

서른을 앞에 둔 어느 여름날, 친구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했다.

친구의 고민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초년생 월급으로 다달이 월세를 내고 남는 돈으로 생활을 감당해야 했고, 지방에서 근무하는 구 남자 친구, 현 남편이 된 당시의 남자 친구와의 결혼문제_ 가족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친구의 속마음.. 그 모든 무거운 고민들을 돌덩이처럼 가슴추에 메달고 지내온 친구의 서울생활을 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는 친구를 설득하고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이 도시에 혼자 남겨지기 싫은 나의 욕심일 것이기 때문에_

당시 유행하던 이태원의 팬시한 디저트 카페에서 이별을 고하던 담담한 친구의 말에 나는 또다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서울, 이 도시는 무엇이길래 나는 혼자 남겨져서 버텨내야 하는가.
그래도 이곳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나는 끝까지 참고 버텨야 한다. 눈을 감고 나를 떠올려보면 나는 거친 숨을 헉헉 거리며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있다.
그렇게 뛰어야지만 평범한 지금을 영위할 수 있다. 나에겐 그 평범함 조차도 숨이 턱끝에 차는 힘듦인데,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서울살이가 때로는 애잔하다. 그래도 나는 이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나아가야 한다.
내가 이곳에서 버텨야 우리 아이들은 내가 겪었던 것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도시를 서성이던 20대의 불안한 나는 희미해지고, 열심히 달리는, 40대를 바라보는 내가 보인다. 여전히 위태롭지만 그래도 쌓여가는 시간만큼 어려움도 가지치기할 줄 아는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었다.

20살 시절, 지하철 타는 법도 몰라서 헤매던 나는, 택시기사님들처럼 시원시원하게 이 다리 저 다리를 건너며 강남, 북의 골목, 구석 지름길을 꿰뚫게 되었다.
가끔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무도 모르게 울던 나는 사라지고, 지금은 속상하면 펑펑 울기도 하고, 단골 카페 사장님과 속 깊은 수다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단단해져 가는 마음만큼 내 오지랖도 커져가서 일상에서 마주치는 인연들에게 마음을 쏟기도 하며 그들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낀다.
흘러간 세월만큼 사는 법을 터득하고, 적당히 마음의 완급조절을 하게 되었다.

그게 비단 나뿐이랴

어린 시절 이 도시에서 마음 둘 곳 없이 서성이던 당신, 

그 시간을 버텨내 이제는 한강의 반짝이는 여름밤, 캔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당신과 나의 히스토리이다.

어디선가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_나는 당신을 잘 모르지만 그 모든 고단함을 버티고 이겨낸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을 살아가는 도시의 당신에게, 애썼다고 잘 버텼다고 우리 함께 살아가자고 나의 마음을 보낸다.

그러니 오늘 밤, 부디 사랑하기를.
끝없이 시작되는 나 자신과의 로맨스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기를.

새벽에 동트기 전 반짝이는 한강 물빛을 바라보며 나와 당신의 안녕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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