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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24. 2021

이진법 세상

01001100..나의 안전한 이진법 세상

                                                                                                                                                                                                                                                                                        

 나는 이진법 세상에 산다. 11011100101…. 아마도 나를 숫자로 표현하면 0과 1뿐일 것이다. 


1과 0뿐인 나의 세상. 얼핏 들으면 세상 간단할 듯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세상만사가 모 아니면 도로 나뉘니 이렇게 고단할 수가 없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뚜렷한 주관과 기호는 필연적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첫째는 자주 고열에 시달렸다. 40도가 넘어가는 아이를 두고도 나는 출근을 했다.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님을 호출했다. 어머님은 시골에 혼자 남으실 아버님 걱정에 오시기를 주저하셨지만, 며느리가 도와달라고 사정하니 어쩔 수 없이 오신다. 서울행을 마뜩잖아하시던 어머님은 이제는 소위 로컬주민이 되셨다. 우리 집 주변 맛있는 김치를 파는 슈퍼사장님과도 인사를 나누시고, 구석구석 숨겨진 산책길을 나보다 더 잘 꿰뚫고 계신다. 


나라고 왜 아파서 넘어가는 애를 두고 일터로 나가고 싶겠냐만 이진법 세상에 사는 나는, 책임감과 자기검열에 걸려 어쩔 수가 없었다. 맡은 바 일을 잘한다. 잘 해낸다는 1. 

나는 주변 동료들에게 일 잘한다는 소리를 꽤 들었다. 신입사원 때는 주어진 업무의 성과를 달성했다며, 우수사원 표창을 받았다. 당시 나와 6개월 차이가 나는 선배가 있었는데 나에게 표현은 안 했지만, 후에 들려오는 뒷담화에서는 몹시 말이 많았다고 한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에겐 업무는 1 이라는 코드가 입력되어서 괜찮았다. 


한다, 안 한다고 나뉘는 1,0.

해낸다, 해내지 않는다로 나뉘는 1,0.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1,0.



일을 분명하고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나의 성격은, 느긋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하는 다른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의 책임감은 결국 네 일도 내가, 내일도 내가 하는 상황이 와버렸다. 업무능력은 있으나 입바른 소리를 내는 불편한 부하직원인 나는, 상사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일복은 많은 나날,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체면에 집착했다. 이런 상황들의 반복은 나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원리원칙에 엄격한 나는 늘 매의 눈으로 사람들을 관찰했다.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 그 실수를 명명백백히 밝혀낼 거 같은 사람, 그 사람이 나였던 것 같다. 

타인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교활한 동료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느낌을 선사한 거 같다. 

아직도 연습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적당히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눈 가리고 아웅’ 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0’으로 수렴하기도 한다.


나는 왜 이진법 세상에 머무르게 된 걸까? 

중간도 없이,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딱 2가지 유형으로만 규정하며 사는 걸까?

답은 엄마가 싫어서 늘 엄마의 반대로만 달리던 내가 있었다.


나는 오롯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여겼다.

우리 엄마에게 자식이란, 본인이 인정한 성적과 학벌, 직업을 가져야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래서 늘 보기 좋게 그 기대를 벗어난 나와 싸움이 붙었다. 


나에겐 남동생이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 남동생은 전국 13등을 하면 나는 전교 13등이었다. 

성립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내가 졌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사춘기 시절, 나는 스스로를 괴롭혔다.

어느 날은 커터 칼로 내 몸에 문신을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전교 13등도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수업시간에 칼로 벅벅 내 팔을 파서 검정 잉크를 흘려보냈다.

하다 보니 아프고 덜컥 겁이 나서 더는 깊게 생채기는 내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흉은 지지 않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적당히 공부 잘하지만, 일진은 아니었던, 나는 그때부터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 그 영향 때문인지 나는 커가면서 더더욱 철저히 선을 그었다.


나의 안전한 이진법 세상.

그 세상으로 나는 달려갔다. 달려갈수록 더, 더 엄마의 반대로 도망쳤다. 


우리 엄마는 한 평생 일을 하셨다. 본인 자녀의 육아는 시어머니인, 나의 할머니에게 아이 둘을 맡겨놓고 일터로 나갔다. 그 시절 아이 둘을 낳고도 사회생활을 이어나가던 엄마는,  IMF 의 고용 혹한기도 잔다르크처럼 무찔러 나갔다.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왔다.


어린 나는 쓸쓸한 날도, 엄마가 그리웠던 날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별명이 연다르크인 워킹맘이 되었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한창 육아중이던 시기에, 엄마는 나에게 별별 소리를 다 퍼부었다.


“ 애 이유식은 만들어야지, 왜 사 먹이냐?”, “ 다른 집 엄마들은 책을 목쉴 때까지 읽어준다는데 너는 왜 안 읽어주냐?”, “ 애한테 교감을 해줘야지 너는 왜 그 모양이냐 ?”, “애 보는 게 뭐가 피곤하다고, 너는 왜 피곤하다고 하는 거냐?” 이 밖에도 무궁무진한 잔소리를 들었다.


당시 나는 자연주의 출산을 하겠노라며 첫 아이를 31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출산했다.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내 아이가 너무 소중해서 매 순간이 최선이었다.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상상하면 아직도 몸이 저릿해져 오는 고통의 순간을 호흡으로 삼키며 3.9 kg 의 아이를 출산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모유 수유부터 뭐 하나 내 아이에게 진심이 아닌 순간이 없는 나였다. 이런 나에게 육아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다그치는 엄마라니….


그렇게 따지면 엄마는 제왕절개로 출산했으며, 분유만 먹였으면서! 어째서 나에게 이런담?


내로남불_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그 말은 딱 엄마를 위한 표현이다.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남한테는 입바른 소리만 하며 젠 척하는 엄마. 본인은 지키지도 못할 것들을 남들에겐 일장 연설하며 강조하는 사람.


그런 엄마가 꼴 보기 싫어서 나는 엄마와 다르게 내가 뱉은 말은 꼭 지키려 일상에서 애를 썼다. 때론 피하고 싶고, 버거워서 포기하고픈 일들도 마주해야 했다. 그뿐이랴. 만나기 불편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호의적으로 이어가려고 감정을 소모했다. 나는 몸이 아프고 쉬고 싶어도 계획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꼭 지켜려 노력했다.


정작 그러다 보니, 나는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공간이 없어서 아이들의 아주 작은 칭얼거림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됐다.

아-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인데. 나는 내 마음조차 내세우고 헤아리지 못하고, 가장 소중한 건 우리 집에 존재하는데 왜 나는 그걸 지키지 못할까?


엄마로 인해 내가 저주에 걸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떻게 하면 나는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의 이진법 세상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더 이상 견고하게 사랑할 수 없을 거 같다.


그래서 시작했다. 나를 알아차리고 제대로 바라봐주려 시작된 ‘나를 향한 사랑’.

부디 이 사랑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내려,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꽃 피우기를 바라며_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엄마가, 그보다 더 너희를 진심으로 깊게 사랑한다는 것을 공기처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를 바라보려 애쓴다. 


언젠가 이진법 세상속의 내가, 마음의 여유와 다양한 선택지를 지닌 오진법, 십진법 세상속에 사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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