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쓴 오래된 편지, 어쩌면 헤어짐이 다행이었던 인연에게
가까운 사람에겐 진실을 말하기가 두렵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겐 진실을 거짓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이제서야 제이, 너에게서 도망쳤던 나의 진심을 뒤늦게나마 전해본다.
추웠던 그 계절을 지나,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 지금 이 시간에 너를 생각하며
너에게 보내는 편지야. 언젠가, 어디선가, 너에게 닿기를 바라며….
제이, 오랜만이야. 어쩌면 너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는 종종 너를 떠올렸어. 더 정확히 나 스스로 가끔 질문했었어. 만약 그때 내가 너에게 솔직했다면, 너는 어쩌면 행복해졌을까 하고 말이야.
나 너무 건방지지?
기억하니? 내가 처음 전학 갔던 그 초등학교, 그 낯설던 복도에서 너와 내가 눈이 마주쳤었잖아. 우린 어렸지만 아마도 알고 있었던 거 같아. 우리가 서로에게 아주 특별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이야.
너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어. 나도 너에게 가까운 친구였지.
그 어렸던 시절에도 나를 괴롭히던 어떤 여자애가 있었잖아. 기억하지? 쓰레기 소각장 뒤로 나를 불러냈던 거칠던 아이, 너는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도와주러 왔었어. 얼마나 고맙고 마음이 놓이던지.
그 뒤로 우리는 매일 인사를 주고받고 점점 더 가까워졌어.
나는 학교가 끝나고 음악학원을 가지 않는 날이면 너의 집을 놀러 갔었지.
너희 집에 가면 네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서 갈 때마다 더 머무르고 싶었어. 너의 다정하시던 할머니는 또 어떠셨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늘 안부를 챙겨주시고, 맛있는 점심도 해주셨잖아. 할머니 안방에서 너와 동생, 나 이렇게 셋이 옹기종기 앉아서 TV를 보던 생각도 난다….
가끔 네 동생이 짓궂은 장난도 쳤지만 참 귀여웠던 거 같아.
그렇게 우리의 어린 유년 시절을 보냈었지. 어느 날 서로의 어릴 적 앨범을 보다가 이건 무슨 인연일까 생각이 들게 깜짝 놀랐던 사진, 기억나지? 우리가 6살, 7살 적일 때 서로의 모습을 각자의 앨범에서 발견했던 거! 알고 보니 우리는 그 시절에 같은 음악학원에 다녔던 거였어.
깔깔 웃으며 어렸을 때 못생겼다며 서로 놀려대던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내가 봐도 나 그때 진짜 못났었어. 우리 엄마가 늘 바빠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봐줬잖아. 할머니가 돈 아깝다며 내 머리를 아주 늦게까지 가쇠(가위)로 잘라줘서 내 머리는 늘 쇼트커트에 삐뚤빼뚤…. 아 지금 그 사진 봐도 나 너무 못났더라.
그러니 제이, 네가 박장대소하며 나를 놀릴 법도 해.
그랬던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조금 더 컸을 때, 그러나 아직 중학생은 아니었던 그때 너에게 전화가 걸려왔었어. 너희 집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됐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 어린 나이에…. 풀이 죽어서 울기만 하던 네가 생각나. 나는 말문이 막혀서 너를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가만히 너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말곤, 너무 어렸던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는 것인지, 그저 우는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는 없었어.
너희 어머니는 참 예쁘셨어. 세련되셨지만…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계시지 않았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겠더라.
나는 음악학원을 계속 다녔잖니. 사실 나 너에게 말 못 했는데, 학원 근처가 너희 어머니가 하시던 옷가게라는거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그 가게 앞을 지나가 보기도 하고…. 어머님 표정을 밖에서 살펴보기도 하고. 오늘은 집에 안 오시려나 혼자 고민도 해보고. 미안해. 너한테 이 이야기는 못 했었어.
그렇게 그해 겨울이 지나가고, 우리 집이 이사를 멀리 가면서 우리는 각자 다른 중학교를 진학했어. 전화와 만남이 줄어들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다른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며 멀어졌지. 그 멀어짐에 나의 제멋대로 가 한몫했지만.
너는 중학생인데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가끔 싸움을 했었지. 나는 학교에서 적당히 눈에 띄는, 띄지도 않는 그런 학생이었어. 우린 어느새 조금씩 궤도가 틀어졌어.
사실 모범생이었던 너가, 한순간에 소위 말하는 일진이 되었지.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어. 아니 사실, 나 때문이었지. 조숙했던 나는 당시 어떤 오빠를 사귀었어. 알아. 우리 모두 어렸고, 미숙했고, 서툴렀다는 것을.
근대 그 시절엔 그냥 키 크고 어른스러운 그 오빠를 만나고 싶었어. 그런데 그 오빠가 너를 어찌 알고 너에게 전화를 해서 나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지? 미안해. 내가 원했던 건 아니었어. 너에게 실수를 한게 너무 미안하고 갑자기 무서워져서 나는 그 오빠도 만나지 않게 되었고, 너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어.
너는 어쩌면 나를 좋아했던 거였니? 우린 친구 였잖아. 아주 오랜시간을 친구로 지냈는대..그게 나를 좋아하는 마음 이었던 거라면 나에게 말해주지 그랬니.
우린 그뒤로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았지. 그러다 뜬금없는 어느 날 밤, 나 아직도 기억해.
고 2, 내가 학교 야자를 마치고 집에 와서 TV 보다가 자려던 그 새벽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잖아. 우리 집 앞이니까 나오라고.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교복을 입은 너에게선 술 냄새가 났어. 얼굴엔 생채기가 나고 손은 다 터져서 피가 났고…. 너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던 거 같아.
아니 사실 너 그때 덜덜 떨면서 나에게 안겼었어. 나는 가만히 너를 안아주었지. 아무 말도 묻지 않았어. 그날 밤, 너와 나만의 비밀이 생긴 거 같더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고, 너는 고향에 남게 되었지.
나는 그뒤로 대학생활 내내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취업을 했어.
서울에서 지내며 힘든 시간이 생기면 어디 맡겨놓은 물건 찾으러 가는 거 마냥 너를 찾았어.
너는 손 뻗으면 잡히는 물건이 아녔는데, 내 마음 저 깊이에서 너는 언제든지 내가 찾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 나랑 같이 시간을 보내줄 힐링이자 킬링타임 같은, 영화 같은 사람….
십 년이 훌쩍 지난 시간에서도 내가 너의 첫사랑이라며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걸 나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너를 보며, 나는 너에게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던 사람.
너랑 함께면 내가 망가질 것 같았어. 너는 늘 나와 함께하고팠던 거 알아.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나는 두려웠어. 너가 말이야.
나랑은 조금 다른 궤적을 걸어가는 네가…. 너랑 함께면 내가 망가질 것 같았어.
너가 가진 것들은. 이 사회에서 말하는소위 스펙이 안되니까. 나를 욕해도 좋아.
하지만 사실이야. 내 안의 욕망은 적어도 이 정도의 대학, 이 정도의 회사에 다니는 남자를 만나야지 그나마 보통,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대학도, 직업도, 생활도 모든 것이 나와는 반대궤도에 서 있는 너는 위태로웠어.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할걸. 그러면 너를 늘 기다리게 하는 일도 없었을텐대..
너는 늘 나를 기다려줬어. 아주 오래된, 특별한 친구라는 명제를 뒤집어쓴 채 늘 너의 곁에 있었지만, 너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나를 그냥 지켜봐 줬어.
내 인생에 가장 힘들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 나는 또 너를 찾았어.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롭고 슬프고, 끝이 안 보이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너를 찾았어. 너는 그래도 되잖아. 너는 나를 대신해서 그곳에 있어 줘도 되잖아. 나 너무 못됐다. 너는 이런 나를 뻔히 알면서도 매번 내가 찾을 때 마다 그 자리에 있어줬어. 그 덕분에 나는 다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고.
나는 너에게 다가가지도, 오지도 않을. 그러면서도 늘 너의 곁을 맴돌며, 너를 찾던 이기적인 사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그 시간을 어느 순간 통째로 날려버리고, 마치 그랬던 적 없는 사람처럼, 너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
그 뒤로 나는 너무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
나는 이제 너의 안부를 물을 수가 없게 되었어. 너는 나에게 없는 사람이야. 너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도 너는 가끔 꿈에 나타나. 나는 그런 너를 보면서 ‘아..꿈이구나...’ 하고 알아차려.
어떨 땐 하루 이틀 밤 내내 내 꿈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을 걸어.
그 때, 내내 나를 기다렸다고 울고 있는 너를 마주해.
제이.
나는 널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 슬퍼하지 마.
너는 이제 내 세상에 없어.
그래도 행복해야 해. 꼭 행복해졌음 좋겠어.
가을 날,
내가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