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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준 Feb 20. 2024

‘피해의식‘ 수업을 듣고

사람, 오토바이, 돌멩이나 자갈 하나 없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장애물도 경사도 없는 곧은길이자 지름길이 있다. 그 길을 투명한 미소로 일정한 속력을 띄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

사람, 오토바이나 차로 가득해 비집고 갈 틈이 없으며, 돌멩이나 자갈을 피할 수 없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갈림길이 되었다가, 골목길이 되었다가, 잿길이 된다. 그 길에 멍하니 주저앉은 사람이 있다.

 

곧은길이자 지름길만 타고 가면 되는 그 자전거가 부러웠다. 그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의 미소를 가지고 싶었다. 그 길만 지나가면 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 사람은 마냥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지름길과는 달리 매번 예측할 수 없고, 속도를 낼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길이 싫었다.


지름길만 쳐다보느라 길 위에 주저앉아 오랜 세월을 보냈다. 주저앉은 오랜 시간 동안 잿길에서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 작은 기억은 바위를 만났던 기억으로 변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오토바이로 놀랐던 기억은 오토바이에 부딪혀 교통사고 났던 기억으로 뒤틀어졌다.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 바위와 교통사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우연히 주저앉은 그 길에서 큰 돌부리에 넘어졌음에도 툭툭 털고 일어나 가는 한 사람을 만났다. 분명히 크게 다친 것 같은데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그 사람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발을 내딛는 건 내 선택이었다. 한 걸음을 내디뎠다. 걸은 발자국만큼 아플 수밖에 없었다. '또 바위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오토바이가 아니라 트럭이 나타나서 치이면 어떡하지?' 하는 나의 생각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쥐어지지 않는 어리석은 꿈이었다.


기억 속 바위는 작디작은 돌멩이에 불과했다. 크게 넘어졌다고 해서 그것은 바위가 아니다. 주위를 잘 살피지 않았던 내 잘못이 더 컸다. 기억 속 부딪혔던 오토바이로 다친 건 오토바이 운전자였다. 나는 겨우 피해서 사고를 면할 수 있었지만, 그 오토바이는 나를 피하려다 미끄러져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 오토바이 운전자는 아직까지 다리를 절뚝거린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 쥐어야 할 것을 쥐지 않고, 흘려보내야 할 것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지름길, 곧은길을 가는 사람만 보였다. 하지만, 길은 지름길, 곧은길만 있는 길은 없다. 반대로 골목길, 갈림길, 잿길만 있는 길도 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지름길이 더 많을 순 있겠지만 그 삶이 더 행복하거나 골목길과 잿길이 많은 삶이 더 불행하거나 뒤쳐진 삶이 아니다. 잿길을 지났기 때문에 담벼락 속 핀 꽃을 볼 수 있었고, 새벽 어스름에 낙엽을 쓰는 할아버지와 인사할 수 있었고, 엄마 손잡은 꼬마가 지나갈 때까지 자전거를 잠시 멈출 수 있었다. 멈췄기에 별과 달을 볼 수 있었다.


언제 길이 달라질지 몰라 매번 좌우를 세심하게 살피며 속력을 조절해야 하고, 넘어져도 일어서서 손을 건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었다. 나의 길을 비켜주었던 사람들, 나 때문에 넘어져서 상처 난 사람들이 지나온 길과 기억에 쌓여간다. 놓쳤던 순간들이 지금 걷는 이 길 앞에서 생각난다. 주춤거릴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여전히 비대한 기억과 유사한 순간에 머뭇거리고 돌아간다. 그 순간만 찾아오면 모든 장기가 조여지는 기분이다.


 머뭇거리는 순간 더 깊이 괴로워하고, 그를 기억하게 된다. 길을 막고, 다치게 한 순간들이 기억난다. 그의 다리를 고쳐줄 순 없겠지만, 그를 태우고 그가 나로 인해 놓친 길을 보여주고 싶다. 그가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


매 순간 자신의 길 앞에서 쥐어야 할 것을 쥐고, 흘려보내야 할 것을 흘려보내는 삶.

그의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지만 그의 풍경이 되어주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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