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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준 Dec 24. 2024

나의 '테두리'

로제타(Rosetta, 1999)

로제타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슈퍼마켓에 찾아가고, 해고당한 일자리에서 행패도 부리고, 운전하고 있는 사장 곁으로 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붙잡는다.

나에게도 작게나마 그런 기억이 있다. 집 앞에 주스전문점이 새로 생겼다. 무작정 찾아 들어갔다.


"혹시, 알바 안 구하세요?"
"아직 생각 없어요."
"오픈하시고 바쁘시면 필요하실 지도 몰라요. 번호 드릴게요. 나중에라도 혹시 알바 필요하시면 저한테 먼저 연락 주시겠어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알바를 다니다가 약 2달 후에 그만뒀다. 그리고 다시 방에 들어갔다. 그때의 나는 딱 그만큼이었다.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딱 그만큼이었다. 그 이상 힘들면 더 버티지 않고 포기했다. 일자리도, 삶도, 내디뎌야 할 한 걸음도. 그때 내딛지 못한 한 걸음은 두 걸음 후퇴로 되돌아왔다. 로제타는 필사적이고, 치열하고, 악착같이 일을 찾기 위해 살았다.


그로부터 7년의 시간이 지났다. 7년에 대한 나의 삶의 태도는 '지난날의 나를 부정하기 위한 삶'이었다.

없앨 수만 있다면, 지워낼 수만 있다면. 참 내가 그저 싫었던 시간이 하루 중 23시간이었다. 지난 7년은 그동안 살아온 업보를 치르는 시간, 그때를 벗어나기 위한 시간이었다.


2020년, 영화 수업을 통해 로제타를 처음 보았다. 2024년, 12월. 다시 로제타가 생각났다. 파리의 마지막날 밤을 보내며 그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 다시 봐야겠다.' 영화 내용에 대해 자세히 기억나지도 않았고, 기억나는 장면과 생각은 너무 화면이 흔들려서 머리 아팠던 것. 생리통이 있을 때 드라이기로 배를 따뜻하게 한 장면. 그 두 가지뿐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로제타 영화를 다시 보았다. '다시'라고 말하기엔 모든 감정이 생소했다. 로제타와 처음 만난 기분이었다. 더 이상 흔들리는 화면 때문에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단호해서 슬펐다. 치열하고 열심히 가득한 그녀의 삶이 고맙기도 했지만, 안쓰럽기도 했다.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뼈와 뼈 사이 공간을 다 채워지는 기운에 뜨거워지고, 몸이 벅찼다.


파리로 떠났던 8일 전, 로제타 영화를 처음 봤던 5년 전,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던 7년 전이 교차되었다.

로제타는 친구인 리케가 주는 마음을 받게 된다. 맥주를 마시고, 토스트를 먹고, 춤도 추고, 컨테이너가 아닌 그의 집에 침대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날 밤, 그녀는 혼잣말을 한다.


난 평범한 삶을 산다.

리케가 준 마음으로 인해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가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몸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녀의 말 한 글자가 새지 않고 몸 곳곳에 흘러들어 침투했다. 겉으로 보기엔 단호함 뿐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그녀의 위태로움과 처절함은 가려지지 않는 모습이다. 일을 해야만 했던, 일을 하고 싶던 로제타는 리케를 배신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고백한다. 일하고 싶었다고. 네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해주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고 로제타는 일하러 가지 않는다고 전화통보한 이후, 가스통을 가져온다. 리케는 그녀에게 찾아오고, 사통을 들고 오다 쓰러지고 우는 로제타를 리케가 일으키며 영화는 갑자기 끝난다.


나는 로제타가 이제 자신을 지키는 삶이 아닌, 너를 지켜주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믿고 싶다.



지난 7년의 삶은 사랑받고 싶어서, 나를 지우고 싶어서, 이전과 다른 나로 살고 싶어서 아득바득한 삶이었다. 더 이상 너를 속이는 데 급급해서 나 자신도 속이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지켜주고, 사랑하는 삶에 다다르지 못했다. 내가 없어져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오해받는 것이 두렵고, 버림받을까 걱정되고, 한 마디로 참는 게 편했다. 웃는 표정이 무표정보다 쉬웠다. 그 시간이 무의미하진 않지만, '나'에서 '너'로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제 겨우 로제타처럼 '일하러 가지 않을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파리에서의 마지막날 밤, 몸살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함께 간 친구한테 너무 미안했지만 몸살은 나에게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몸과 마음의 신호들이 리플리 증후군의 증상일까 작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다행이었다. 리플리 증후군은 아니구나 싶어서.


나를 지키고 싶다. 나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를 지켜줄 수 있다.


세상이 조금 덜 무서워졌다. 한 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때로는 열 명에게 오해받아도, 아니 당장 내가 지켜주고 싶은 그 사람에게 오해받아도 그 시간이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면 그 시간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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