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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cingRan Oct 22. 2022

기록 집착러의 흔한 기록 이야기

029. 기록



다양한 기록의 형태가 있지만 가장 쉽고 효과적이고 오래가는 건 역시 글인 것 같다.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기록을 선호하는 유형의 대부분은 아마도 글일 테지. 나 역시 기록에 상당한 집착을 가진 사람인데, 완성된 글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기록하는 사람이 된 건 두 가지의 이유였다.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거나 갑자기 기억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준비를 하고 싶었다. 사고나 치매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거니까.


기억에 대해 처음 진지하게 생각했던 건 치매노인들을 경험한 때였다.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생각하기 전부터 봉사활동을 꾸준히 다녔다. 가장 오랫동안 다녔던 곳이 치매노인을 위한 기관이었는데, 매주 만나는 이 노인들을 관찰하면서 상념에 잠겼다.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과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히는 것은 존재의 가치를 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서 사라지는 것보다 더 두렵고 또 비참한 일인 것 같아서. 기억을 잃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무척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삶이란 경험과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니까.


그래서 닥치는 대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의 대화를 녹음하고, 순간순간 메모를 했고, 사진을 찍고 또 글을 썼다. 그 모든 순간의 기록을 디지털화하여 폴더로 분류하고 꽤 오랫동안 잘 모아뒀다. 잊고 싶지 않아서, 잊히기 싫어서. 하지만 재밌는 것은 그렇데 잘 모셔둔 기록도 어떻게든 사라질 수 있다. 모아둔 하드 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날아가거나, 백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한꺼번에 삭제하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꽤 오랫동안 매일 써왔던 온갖 종류의 일기, 직접 대본까지 써가며 읽었던 인터넷 방송 녹음본, 이곳저곳에서 선물 받은 글이나 음악,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스토리를 이어 붙였던 소설, 어떤 상황에 따라 흘러왔던 많은 대화들, 그때의 감성이 묻어나는 사진들. 그 순간에만 남기고 누릴 수 있었던 기록들. 이런 것들이 사라질 때마다 느꼈던 상실감을 떠올려 본다. 우스운 건 동시에 이미 날아가 버린 데이터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들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도서와 기록들이 사라지게 되어 칼 세이건도 무척 안타까워했고, 나도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매우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사라져 버린 모든 지식과 정보의 값어치를 환산하면 엄청났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 남아있게 된 것들도 분명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뭐든 남겨두기를 좋아하니까. 자식을 낳아 후대를 잇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인 것처럼.


기억이라는 것도 참 신기하다. 잊고 싶지 않아서 기록으로 남겨놨지만, 다시 열어봐도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미 사라져 버린 적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나의 뇌는 임의대로 트라우마의 기억을 10년이나 숨겼는데, 어떤 작은 계기로 인해 결국 떠올라 버려서 각인된 걸 보면 잊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에는 부쩍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애정을 가지고 챙겨보는 펀자이씨 작가의 인스타툰 ‘순간을 달리는 할머니’ 때문이다. 그녀는 기억을 잃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그린다.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소설 <정혜>를 쓰신 우애령 작가님의 말과 태도에서 삶의 어떤 전환점이 될만한 큰 울림과 궤적을 발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글과 그림으로 남겨지는 기록에 의해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삶과 기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기억을 잃거나 사고를 당하는 순간들을 위해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이 기억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기록이나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습게도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수많은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나는 결국 기록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기록하기를 좋아하고, 기록 자체를 수집하는 사람. 그래서 열심히 쓰고, 어떻게든 저장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간에. 그러다 또 어느 날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해도 기록은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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