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理性)과 신심(信必) 이 줄다리기를 하던 P 아주머니.
P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작년 이맘때, 요즘처럼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나의 눈물콧물을 쏙 빼던 어느 봄날이었다. 차트를 읽으면서 항암 치료가 여러 번 실패했는데 꽤 오래 항암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외래 노트를 찬찬히 읽어보니 여러 번 가정형 호스피스 권유를 받으셨는데도 계속 항암 치료를 받겠다고 하셨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컨설트가 온 이유는 아마도 Goals of Care conversation( 환자와 환자 보호자, 그리고 환자의 치료에 참여하는 의료진들이 모여 함께 현재 상황을 점검하고 치료의 목표를 다시 한번 정립해 보기 위해 가지는 모임)을 위해서일 것이다.
꿈뻑꿈뻑하는 둥그런 눈이 인상적이었던 P 아주머니는 말수가 많지 않으셨다. 이민 1세대답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는 다른, 이민 1세대 특유의 그 특성을 잘 유지하고 계셨다. 그리고 아주 튼튼한 사회적 지지 네트워크를 갖고 계셨는데, 아주머니가 덮고 있던 쾌유를 비는 메시지가 수 놓인 알록달록한 담요라든지 침대 주변의 각종 카드 및 풍선들이 아주머니가 얼마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잘 말해 주었다. 나랑 면담하는 와중에도 전화가 여러 군데에서 와서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어보는 등 아주머니는 참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여쭈어 보니 가족뿐 아니라 주변의 친척들, 그리고 다니시는 종교 단체의 친구들이 아주머니의 케어에 깊이 연관되어 다 같이 아주머니를 돌보고 있단다.
아주머니는 알고 보니 내가 예전에 일하던 네트워크의 다른 병원에서 사회 복지사로 오랜 기간 일하던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일한 것이 2년 전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할 때 아주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순간만큼은 한 때 건강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하던 P 아주머니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일했던 병원 네트워크는 스탭 중에 이민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전형적인 미국 직장과는 조금 다른 직장 문화가 있다. 역시 이민 1세대인 데다 그 네트워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내가 아주머니의 직장 생활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던 레지던트 시절, 밤에 일하거나 명절날 일할 때 각종 다양한 먹거리로 나를 먹이고, 환자들이 난동 부릴 때 슬며시 다가와 나를 위로해 주던 생활력 강하고 마음씨 따뜻한 아줌마들이 그곳에 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우울했다. 조금 더 파헤쳐 보니 아주머니의 이 우울의 근원은 '나는 아직 더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더 벌고 싶어 하는 말기암 환자는 매우 흔하지만(if not all) 가만히 아주머니의 그 소망을 조금씩 더 캐어 나가다 보니 아주머니는 완치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첫 만남 이후 아주머니를 좀 더 알아가면서 아주머니에게는 종교와 그 종교 단체에서 오는 서포트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적을 바라는 신심(信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은 완치되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아는 이성(理性)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아주머니의 꿈뻑꿈뻑하는 그 눈 앞에서 나는 왜 어릴 때 본 외양간의 소가 생각났을까. ' 나는 살고 싶다 '라는, 인간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소망을 말하는 아주머니 앞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아주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아주머니는 몇 차례의 미팅 후 결국 가정형 호스피스를 선택하셨다.
'호스피스' 하면 생각하는 정형화된 고정관념이 있다. 임종 말기의 환자가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연명 치료를 중단한 후 집을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평소에 쓰던 침대에 누워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두는. 그런데 다양한 인종이 살아가는 미국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주로 교육을 받은 백인 계층들의 생각이고, 문화, 종교, 교육 수준,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이 다른 계층에서는 확연히 다른 행태를 보이기 때문에 환자의 그런 다양한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완화의학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P 아주머니는 불안하고 우울할 때는 기도를 한다고 하셨다. 아주머니의 신은 기도하는 아주머니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