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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May 29. 2022

내 친구는 암 생존자입니다

암, 그 이후의 삶에 관하여

    내 친구 W는 오리지널 뉴요커이다. 인구 전입이 많은 뉴욕에서 보기 드문 맨해튼에서 태어나서 맨해튼에서 자란 아이로 고조할아버지인가 그 윗대 할아버지가 동유럽 어딘가에서 뉴욕으로 이민을 오셨다는데 토착민답게 자기가 이민 몇 세대인가 이런 건 모른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언뜻 보면 엄청 까탈스러운 깍쟁이 뉴요커 같지만 알고 보면 구멍 투성이인 W.

    

    이민 오는 줄도 모르고 이민 와서 급속한 환경의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 있던 나와 암에 걸린 후 인생이 180도 뒤바뀐 W. 언뜻 보면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우리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졸업한 아이비리그 대학에 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모든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오던 W.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동문으로 있는  꿈의 학교에서 합격 통지를 받고 신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18세의 W에게 뇌종양은 어느  갑자기 교통사고처럼 찾아왔다. 머리가 아프고 잠을 너무 자고 농구할  슛이   들어가서 주치의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라고,  나이에는 그럴  있다고 괜찮다고 해서 안심했지만 증상이 계속되자 CT 찍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내일 아침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CT '' 있다고 했단다. 그렇게 머리에 종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주일 만에 수술대에 올라간  회복실에서 눈을  W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W 암은 소뇌를 침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뇌는 운동 조절에  역할을 한다- 걷는 법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동작을 모조리 다시 배워야 했다. 그로 인해 장애 진단을 받게 되었고 지금도 자세히 보면 W 걷는 모습이 살짝 불안정하다. 그렇게 좋아하던 농구도 못하게 되었고 소망하던 꿈의 대학 생활 역시 이미 2 간의 암투병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W 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보행이 힘들어 처음에는 교내에서 골프장 카트 같은 것을 타고 다녔는데 철없는 애들이 W 카트를 쓰레기장에 갖다 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만사가 귀찮고 의미 없고 그래서 공부도 별로  하고 교내 활동도 별로 하지 않고 그냥 ~ 적당~ 지냈다고 한다.    


    암이 W에게 남긴  다른 상흔은 대머리  것이다. 수술  이어진 방사선과 항암 치료로 W 머리칼은 바스러져갔다. 한창 외모에 예민할 나이에 대머리가 되면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할까  너무 슬펐었다 진지하게 말하던 W. 점점 줄어가는 머리카락을 놓지 못하고 번뇌하고  번뇌하며 가르마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뉴욕 시내 잘한다는 미용사는  찾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30대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미련을 접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밀어버렸다. 민머리의 W는 거짓말  보태어서  브리너 같다. 최근 들어서는 수염기르기 시작했다.


 

 

    암은 W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유머 감각도 좋아서 리더십 역할도 곧잘 맡는 인싸였던 아이는 암투병을 거치면서 죽음의 가시권 안에 들어가 보았던 두려움 손바닥 안의   삶의 덧없음 알게 되었고, 수술  장애로 인해 낮아진 자존감, 재발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염세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한 태도는 커리어에도 영향을 끼쳐 20대의 W 어차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직장이  무슨 소용이냐 하고 대충 살았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암이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 삶에 대한 의욕이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어릴 때부터 꿈꿔오던  나가는 월스트리트 금융맨의 길에서 많이 멀어진 후였다. W 자기가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금융계에서 일하며 수십억  연봉을 벌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탄처럼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과로사로 사망했을 수도 있지 내지는 이혼당하고 우울증 걸려서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잖아? 라며 농담으로 받아치지만 W 말이 과히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속으로는 동의한다.  


    반면 묵묵히 암을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까지  자신의 용기와 끈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렇게 하는  아니냐고, 시키는   해야지  그러면 그냥 죽냐? 하고 말하는 W에게 그래도 나는 네가 정말 대단하고  삶에 대한 애착과 용기에 박수 보낸다고, 그런 너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면 좋겠다고 유튜브를 하라고 종종 권유한다. W 통해서 나는 사람들이 암환자, 특히 뇌종양 환자분들에게 편견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뇌수술을 해서 멍청해졌다든지-, 암환자분들의 삶에 대해서  깊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W 공감하고 응원하면서 미국에   달라진  속에서 겪는 어려움과 수많은 편견들에 이리저리 구르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민자라는 나의  다른 자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W가 얼마 전 대장 내시경을 했다. 뭐 별 일 있겠어했는데 용종이 서른 개가 넘게 있었다고 한다. 아직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향후 치료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용종들이 암으로 변하기 전에 예방적으로 대장을 절제하고 장루를 다는 것이다.    


    나는 기도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이미 한 번 모질게 암과의 사투를 벌인 내 친구가 또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마음 모아 기도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지금, 잠시만 시간을 내어 내 친구 W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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