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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Feb 09. 2021

귀를 자유케 하리라

일기, 21.02.08

2월 7일, 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어폰을 떨어뜨렸다. 길바닥에서 박살이 났다.



덕분에 2월 8일 월요일, 오늘부터 무기한으로 새로운 체험을 해 보기로 했다. 음악을 듣지 않고 살아보는 것이다.


이 도전과제가 내게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하루씩은 음악을 안 듣고 살아보기도 했다. 내겐 좀 괴짜 같은 버릇이 있는데, 하루를 정해서 스스로에게 어떤 과제를 부과해 보는 것이다. 물론 매일같이 나 자신에게 혹독해질 만큼의 괴짜는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어떤 것 하나에 너무 몰두하다 생활의 균형을 잃어가는 나 자신을 감지하곤 한다. 유튜브에 빠져 반나절을 허비하기도 하고(유튜브라는 회사를 비판하는  아니지만 어느덧 동영상 사이트 이상의 일반 명사처럼 변해버린 유튜브...), 급한 일이 있음에도 절반은 도피성 의도로 PC방으로 향하기도 하고, 궁금한 질문이 떠오른 즉시 위키피디아나 (대부분은) 나무 위키에서 검색을 하다 잔챙이 정보들까지 찾아내느라 밤을 새기도 한다. 이런 일이 일정 시간 이상 반복되면 이 일들을 하면서도 불안해진다. 그러다 계획한 일마저 차일피일 미뤄지면 자존감마저 땅을 뚫고 내려가는 것이다. 하루치 과제 부여는 이런 내게 잠깐 제동을 거는 행위랄까.



사실 음악을 듣는 거야 앞에 열거한 일들처럼 중독성이 세지는 않다. 학원 출퇴근 길에 이어폰을 꽂고 재즈부터 클래식, 걸그룹 노래를 종횡무진하는 습관은 오히려 시래기 줄기처럼 지친 몸에 넉넉한 수분과 산소가 된다. 책을 읽다가도 졸리면 유튜브에 올라온 노래들을 한 시간쯤 재생시켜 놓고 왼 손 검지로 리듬을 두드려가며 읽는다. 갑자기 왜 음악을 듣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했는가. 오기 때문이다. 이어폰이 박살 나서 슬픈 현실을 부정하며, 부서진 플라스틱을 어떻게든 붙여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이제 외출 때마다 심심해질 테니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그득그득했다. 휴대폰에 음악을 나만 들을 수 있는 음량으로 틀어 놓고 전화하는 척하며 걸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끝내 부서진 플라스틱 단면이 서로 붙질 않아 이어폰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찰나, 오기가 쑥 올라왔다.


음악이 무슨 신발 같은 물건도 아닌데 왜 걱정이람, 그냥 음악 안 들으면서 걸어가면 되지. 이 참에 집에서도 음악을 듣지 않고 살아보자(피아노 연주에 관해서는 최근 열심히 연습하는 곡이 있으므로 예외로 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 동안 음악을 찾아 듣지 않았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책상머리에 앉아 돌이켜보니 음악이 없어진 경험은 내게 많은 신기함을 선사했다.


빌 에반스 (출처: Pinterest)

우선 음악을 고르느라 길 한복판에 서 있지 않게 되었다. 나는 보통 음악을 들을 때 유튜브에 업로드된 노래를 재생한다. 물론 같은 노래를 한 시간 연속해서 듣게 만든 영상도 있고 앨범 하나를 통째로 영상으로 만든 버전도 있다. 그런데 본디 내가 듣는 노래는 장르가 기분에 따라 바뀐다. 조금 걷다 보면 금세 지루해진 나머지 다시 휴대폰을 꺼내어 이 가수에서 저 가수로, 21세기에서 20세기로 마구 갈아탄다. 그 사이에 다가오는 행인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길바닥에서 뭘 들을지 고독한 고민을 한다. 음악이 좋아서 그런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음악을 즐길 시간은 계속 줄어든다. 그러던 내가 음악을 아예 안 들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이따금 떠오른 노래가 있으면 콧노래로 흥얼거리면 그만이었다. 음역대가 안 따라줘도 뭐 어떤가, 똑같은 음을 내면서도 머릿속에선 나얼이 마이크를 쥐고 빌 에반스가 건반을 누르고 있는데.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 <카우보이 비밥> (출처: Pinterest)

또 신기하게도 바깥 경치며 잡다한 소리들이 내 감각기관을 거쳐 음악 패시지로 다시 만들어졌다. 무슨 작곡가가 악상 떠올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찻길 위 신호등이 파란불이 되어 정지했던 차량들이 소떼처럼 달리기 시작하면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의 추격씬 OST가 떠오른다. 공원 화단에서 까치가 날개를 퍼덕이며 둥지로 날아갈 땐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첫 선율이 아른거린다. 시종일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내가 아는 노래 범위 안에서 들은 음악을 듣고 또 들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듣는 일' 자체가 물리고 만다. 사물에서 얻는 순수한 감각이 기억 속에서 음악을 불러일으키는 그 '찰나'가 퍽 예쁘다는 사실을, 진작 이어폰을 빼고 다녔다면 더 일찍 알았을 텐데.



그밖에도 뒤에서 오는 차에 대해 반응 속도가 빨라진 느낌도 있고, 버스에서 음악을 고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내리지 않아도 되는 이점도 있다. 이 노래 저 노래 흥얼거리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있어서도 놀랐다. 하루 동안만 음악을 안 들었을 땐 그 '하루'라는 시간에 너무 집착해서 변화에서 빨리 돌아오기만 바랐다. 아예 기한마저 정하지 않고 실천하니 마음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지 골몰하게 된다. 마음이 바뀌면 날 밝는 대로 당장 이어폰을 사서 다시 귀에 꽂고 다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가 편할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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