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피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언제부터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요?
가끔은 현실주의적 사고에 휩쓸려 본질을 추구하는 게 오히려 이상적인 관점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피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본질을 중요시하는 우리가, 현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의 대상이 학문에 관한 것일 수도, 혹은 직업에 관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질을 추구하며 나아갑니다. 피치님과의 인터뷰를 함께 읽어나가시죠 :)
- 저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는데 요즘 들어 그 색을 잃고 점차 현실에 맞춰가고 있는 것 같아요. 현실과 이상의 비중을 조절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일단 제가 스스로를 이상적이라고 하는 건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사회문제를 비판할 때, 그 베이스로 반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요. 체제를 비판한다는 건 현실주의보다는 사실상 이상주의에 가까운 것이잖아요? 다음으로는 학교 공부나 직업 등에 대한 가치관이 이상적이라고 느껴요. 예를 들자면,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가 배움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취업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저는 배움 그 자체를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관점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직업에 대해서도 경제적인 측면보다 저의 자아실현이 가능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어쨌든 현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세 번째로는, 삶에 대해서도 맘껏 기대하자!라는 마인드랄까요. 맘껏 꿈꾸고,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비관적인 인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상적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기적인 것보다는 이타적인 것,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편입니다. 평화, 공존, 공생과 같은 것들을 굉장히 지향해요.
이렇게 저의 이상적 가치관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즘 현실성의 비중을 높이는 까닭은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이 주변에 없고, 현실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자꾸만 위축이 돼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 앞서 말한 가치관들이 아무래도 저의 정체성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제 정체성이 이 시대와 맞지 않아서 대부분의 제 또래들과 맘 속 깊은 곳까지 공유하기는 어렵겠다는 외로움이 느껴지면서도, 반대로 내가 특별한 사람인가? 하는 자의식이 생성되기도 했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다른 관점을 가진 내가 더 쓸모 있고 잘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했어요. 세부적으로 설명하자면, 제가 좋아하고 바란 것들은 대부분 순수 학문 쪽이에요.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대학 학문으로 치면 경영학, 경제학의 열풍이 있잖아요. 제가 순수 학문을 추구하면서 경제적 가치는 없어도 결국 내면에서 원하는 방향을 찾아가겠다는 점인데, 이게 요즘에는 인정이나 이해를 받기 어려워서, 차라리 이런 분야를 맘껏 할 수 있는 더 과거의 시대에 제가 존재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웃음)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스스로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고, 직업관이나 학문에 대한 관심사 자체도 마이너해서 보통 또래들과 고민을 이야기하면 진실된 소통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러한 가치관 덕분에 제가 좀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자의식이 생기기도 했으니 좋은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겠네요.
- 저의 이상적인 가치관의 기반은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 사회 문제나 사건들입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사건, 여성 혐오범죄, 산재사고로 인한 죽음, 대학의 기업화 등등이요. 사실상 세월호 사건이 제게는 가장 큰 영향을 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중학교 때 독서토론 논술하면서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와, 또 한겨레신문으로부터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탈물질적 가치관과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을 깨닫게끔 그 길을 열어주셨어요. 추가적으로 인문학이나 철학에서 받은 영향을 이야기하자면, 실존주의, 융 심리학, 여성주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있어요. 융의 심리학의 경우에는 나의 자아와 self를 찾고 고민하는 것에 도움이 되어, 특히나 자아 성찰을 깊이 있게 하게 된 계기였어요. 또,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영화로는 '변호인'을 뽑을 수 있을 것 같네요.
- 우선 저는 사회학과에 진학하기로 선택한 것이 제 이상적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약자, 소수자, 인권 등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이러한 가치관으로부터 직업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직업은 자아실현의 수단이거든요. 제게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라는 게 가장 상위의 목표다 보니, 현재로서는 그걸 실현하기 위해 배우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대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제 가치관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고요.
- 저는 제 가치관이 다수의 입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이나 낙오된 것 같은 느낌이 '이상적인 사람'이라서 겪는 어려움이나 고민이 되는 것 같아요. 가끔 보면 다름이 아니라 틀림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다수의 입장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니까, 저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참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 비슷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동질감을 형성하고 연대하는 태도가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6.1. 동질감 형성이나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 과연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보통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의 활동을 할 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신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대화를 이어가지 않나요? 저는 그랬어요. 관련된 분야의 활동을 하고, 비슷한 가치관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게 참 중요하더라고요. 이런 대화가 정말로 필요하고, 그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제 가슴에 불을 때는 작업을 주기적으로 해야만 나의 이상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혼자 있다 보면 능력 개발이나 성과 위주의 생각을 하게 되니까, 저의 관심사나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화나 교류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핀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걸 보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한데, 동질감 형성과 연대가 과연 그 중간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수 있는지가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우리가 연대해서 인권 침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와 같은 고민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못한다고 누군가는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같이 얘기하면서 고민을 하는 태도는 꼭 필요하고, 나아가서 내가 지속적으로 가치관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 우선 제가 위축된 경험을 생각해보면, 현실적인 딜레마가 느껴질 때인 것 같습니다. 특히 부의 가치만 추구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딜레마를 어떻게 깰지가 큰 고민이고, 이 세상의 현실을 내가 잘 모르는 건가?라는 생각 때문에 위축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기보다는 오히려 피하기만 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았어요. 상대방에게 나를 어필한다기보다 나의 면모를 숨기게 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의 본래 모습을 숨기게 되는 사람과는 깊은 대화가 힘들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만약 이상적 행동을 어필하거나, 설득하고 싶다면 '연결'을 시켜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봐요. 당신과도 연결된 문제이니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라고 설득 및 주장을 하는 것이죠. 모든 사회적 문제는 본인의 것으로 해석되어야 자연스레 문제의식이 생기는데, 그 과정에서 연결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제가 달성한 것들이 100% 제 노력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만큼, 우리는 사회에 빚진 게 있고, 주변 사람에게도 빚진 게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을 통해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이때 책임감과 부채감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연결하는 것도 좋은 방향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는 약자, 피해자, 소수자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들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들어주는걸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거죠. 나와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아와 합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느껴요.
그리고 저만의 논리를 만들고, 이를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쉽게 말하자면 똑똑해져야 한다는 것인데, 무엇이든 주장할 때 논거나 지식이 진짜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에 비해 세상을 살아가는 게 더 쉬운 편이라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진보적인 사람은 현대 사회에서 틀을 깨고,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무언가를 바꾸게 만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다수이다 보니까요. 이러한 측면에서 제 개인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핀님도 "우리" 중에 한 명으로서 존재해줘서 기쁘고, 이런 질문지 만들어주고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해 줘서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