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려도 풀리지 않아도.
한 동안 신지 않았던 겨울 운동화를 꺼냈습니다. 발에 살이 빠진 걸까요? 아니면 신발장 안에 있던 신발이 절로 늘어난 것일까요? 오랜만에 신은 신발이 헐렁해서 매듭을 다시 묶으려는데, 작년에 얼마나 매듭을 꽉 묶었던지 이를 꽉 물고 손 끝에 힘을 꽉 주면서 겨우 묶인 매듭을 풀었습니다. 매듭과 씨름하던 중 이적의 '매듭'이라는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그대라는 오랜 매듭이 가슴속 깊이 남아서 아무것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날이 지날수록 더 헝클어지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어 그대여"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매듭 몇 개쯤은 있지 않을까요. 헝클어지고 풀기 힘든 매듭이 생기기 전에 그때그때 풀어내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죠. 제 신발의 매듭처럼 너무 꽉 묶여 있어서 풀기 힘든 매듭도 있을 테고, 그때 그 시점과 그 상황으로 돌아가야만 풀 수 있는 매듭도 있을 테고, 묶여 있었는지 조차 잊고 있던 매듭도 있을 테고, 노래 가사처럼 점점 더 헝클어져만 가는 매듭도 있을 것입니다. 매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중 '매듭은 꼭 다 풀어내야 하나? 그냥 둬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가 답일까요?
우리 몸에도 매듭이 있습니다. 신장에 있는 사구체는 모세혈관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기관으로 신장으로 들어온 혈액의 여과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투과성이 높은 모세혈관이 한 공간에 얽혀 있음으로 인해 효과적인 여과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에 풀려서는 안 되는 매듭입니다.
반면 풀려야만 하는 매듭도 있습니다. 개개인의 소중한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평소에는 세포의 핵 속에 매듭처럼 꽁꽁 묶여 응축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특정 유전자가 발현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DNA는 느슨하게 풀려서 유전자 발현 과정에 필요한 요소들이 DNA에 접근하도록 합니다.
모든 매듭을 다 풀어야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아픈 매듭이나 너무 오래되어서 더 이상 풀 수 없는 매듭은 그냥 둬도 되지 않을까요? 먼 훗날 그 매듭이 엉키고 설킨 실타래들을 오히려 정리해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꼭 풀어야 되는 매듭이라면, 힘을 꽉 주고 풀어야 할 만큼 단단하게 엉키기 전에 푸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