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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하 Jan 19. 2023

죽음의 역설

모든 것을 삶에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왜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삶에 대한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 시간은 지속적으로 흘러가며, 늙고 병들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죽음이 아닌 삶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죽음은 살아있는 인간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관념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죽음의 두려움은 살아 있는 인간이 상상하는 세계에 불과하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겪어보지 못한 삶으로서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보다 강렬하지 못한 것은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삶을 깊게 사유할수록 그 지평은 무한히 넓으며 이 무한함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일말의 가련한 상상력은 무산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사라지고 소멸한다는 일련의 사건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질 이유는 없다. 그것은 실질적 고통이 아닌 그러한 종류의 관념과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혀 행복하지 않거나 충만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음에도, 삶이 극히 불행함에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이러니인 것이다. 죽음은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운 것이 된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삶에 대한 성찰이 절실하다.


삶을 치열하게 성찰할 때 죽음은 작품이 된다.

세계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고 탄생하며, 자연적으로 모든 것들은 흘러가기에 모든 죽어감이 모든 살아감의 양분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은 얼마나 숭고한가? 그리고 영원히 살겠다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태초의 존재가 아닌 모든 존재의 삶은 다른 존재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랑하라! 고 말한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를 잉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그러한 사랑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존재는 두려움이 가득한 삶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가며 죽어가는 존재이기에 아름답다. 따라서 사랑은 미학적으로 해석된다. 사랑하는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형성해나가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죽음이라는 완결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태어남과 죽어감으로써의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를 긍정함과 동시에 자신을 긍정하며 나아가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사유를 통해서만 유일하게 긍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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