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들국화, 들국화의 추억

by 박현준

대화가 귀찮은 때였다. 집에 들어오면 방에 틀어박혀 라디오를 끼고 살았고, 약간의 TV 시청 혹은 드문드문 이어지는 독서만이 위안을 주던 때였다. 가족들과의 시간은 최악이었고, 친구들과의 시간도 가족보다는 나았지만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립감을 달래기에는 턱도 없었다. 방황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방황해야 하는지도 몰라 안으로만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던 때였다.


중학교 3학년 말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나는 혹독한 사춘기의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요즘은 남자애들이라도 중학교 입학하면서 사춘기가 시작된다는데, 당시 추세가 그랬는지 내가 좀 덜떨어져서 그랬는지 나는 그 나이에서야 사춘기라는 것을 겪게 됐고, 늦게 시작한 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반항의 강도는 폭발 직전이었다. 시너인지 휘발유인지 LPG인지 모를 액체가 온몸에서 부글부글 끓어넘쳐 폭발 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에 쓸 만한 성냥쪼가리 하나 발견할 수 없어 답답해하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럴 땐 폭발의 대용물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보통의 사춘기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그 대용물을 음악에서 찾았다. 사춘기의 폭발 대용물로 락 음악만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다행히도 이 시기, 즉 1986년~87년 무렵은 한국 락 음악의 춘추전국시대이자,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락 음악의 전성기였다. 따라서 당시 나에게는 나를 대신해 폭발해줄 성능 좋은 대용품이 풍부하게 존재했다. 그 대용품 중 가장 나를 흡족하게 했던 것은 단연 들국화와 부활이었다.


그런데 부활의 음악은 지금의 이승철 노래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기본적으로 락 발라드에 가까운 것이어서 세상을 다 뒤덮어버릴 강력한 폭발이 필요했던 당시의 나를 100%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한편 시나위나 백두산처럼 들국화보다 훨씬 강렬한 사운드를 뽐내는 헤비메탈 밴드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메탈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던 나에게 그들은 스피드와 파워만 앞세운 카피밴드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실제로 그런 측면이 없지도 않았다)


반면 들국화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때로는 지구를 뒤흔들듯 포효하다가도 뒤돌아서 잔잔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러다가 다시 깃발을 들고 앞장서며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쥐락펴락했다. 이와 같은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 다른 말로 하면 장르적 다양성이 들국화 1집을 명반으로 손꼽히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토속성이랄까, 독창성 같은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앞서 시나위나 백두산 같은 동시대 밴드들에서 외국 메탈그룹들의 흔적이 진하게 베어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들국화 1집이야말로 한국적 락음악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구현해 보인 희대의 걸작이었다. 즉 이들의 음악은 형식은 락이로되 다른 어느 나라의 락음악과도 다른, 즉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만들어낼 수 없는 토종 락음악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인해 들국화 1집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게 된다.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언론이나 평론가 집단에서 잊어버릴만 하면 진행하는 분야별 걸작 랭킹에서 1위를 도맡아 차지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세계 영화사에서는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 팝 음악사에서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한국 영화사에서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1등 고정멤버들인데 한국 대중음악사에서는 들국화 1집이 그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인권의 비틀즈 애호, 그 중에서도 존 레넌에 대한 경배는 널리 알려져 있고 그 흔적은 1집의 앨범 디자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1집 만큼이나 많이 들었던 두 장짜리 라이브 앨범의 커버 역시 비틀즈의 <The White Album> 디자인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음악성만 닮으면 좋았을 것을 그룹의 운명도 비틀즈를 닮아 단명하고 말았다. 비틀즈가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으로 해산했듯 들국화 역시 전인권과 최성원의 불협화음으로 단 두 장의 정규앨범만 낸 채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전인권=존 레넌, 최성원=폴 매카트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룹 해산 후 전인권은 최성원의 음악적 그늘을 벗어나 <추억의 들국화>라는 또 하나의 걸작을 발표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폭발적인 가창력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인상적으로 증명해냈다. 사실 음악성 측면에서만 놓고 보면 오히려 1집을 능가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완벽한 구성을 자랑하는 이 앨범에는 <북소리>, <사랑한 후에>, <머리에 꽃을>, <사노라면> 등의 가작(佳作)들이 담겨 있다. 특히 대표곡인 <사랑한 후에>를 그 원곡인 Al Stewart의 <The Palace of Versailles>와 비교해 들어보면 전인권이란 음악가의 가창력과 해석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전인권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 여행 중 자동차로 사막 같은 데를 횡단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Al Stewart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사랑한 후에>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나는 원작보다 나은 리메이크는 없다는 속설이 보편진리는 아님을 이 노래보다 완벽하게 증명하는 사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몇 년 전 전인권은 <걱정말아요 그대>를 내놓으며 자신의 범접할 수 없는 음악적 재해석 능력을 다시 한 번 뽐낸 바 있다. 표절과 관련한 구설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원작을 능가하는 리메이크의 또 다른 완벽한 사례가 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들국화 노래를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동서고금과 예술장르를 막론하고 명작의 필수요건 중 하나가 반복되는 향수에 견디는 힘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용돈을 아끼고 아껴 산(사실을 고백하자면 아낀 용돈보다는 부풀린 책값이 기여한 바가 훨씬 컸다) 빨강색 삼성 마이마이 오토리버스 워크맨에 들국화 테이프를 처음 끼웠던 때의 가슴 떨리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선하다.


테이프만 괴롭힌 게 아니었다. 공연장에도 쫓아다녔다. 물론 고등학생이라는 시간적 금전적 제약 때문에 그 횟수는 두 번에 그쳤다. 그것도 한 번은 야외 무료공연이었다. 88서울올림픽 기간에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3일 연속 관람을 했었는데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사랑한 후에>로 시작해서(석양의 광장과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로 시작하는 가사의 기막힌 조화!) 당시 막 발표돼 인기를 끌던 <돌고 돌고 돌고>를 거쳐 <행진>과 <그것만이 내 세상>으로 마무리되는 공연의 전 과정에 열광적으로 반응했었다. 마지막 날에는 공연 후 대기실로 찾아가 전인권의 사인을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사인지를 코팅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가지고 다녔었다. 내가 연예인에게 받아본 처음이자 마지막 사인이었다.


나머지 한 번은 고3 때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아듀 들국화’ 공연이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룹 해체 고별공연이었다. 입장료는 ‘거금’ 3만원이었다. 당시 내 한 달 용돈에 버금가는 액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행자를 찾기 위해 몇몇 친구들에게 수작을 걸었을 때 내 모범생 친구들은 학력고사를 눈앞에 두고 그 많은 돈을 내서 공연을 보러 가겠다는 나를 외계인이나 반 정신병자 바라보듯 했다. 결국 혼자 보러 가게 됐는데 지금도 나는 그 때 내 동행제의를 거절했던 친구들을 몹시 가엽게 생각하고 있다. 장담하건데 내가 그 공연에서 느꼈던 벅찬 감동을 그 친구들은 평생동안 결코 느껴보지 못했으리라.


그 후로 잦은 대마초 흡연과 음악 외적 스캔들(故 이은주와의 사건) 등으로 인해 전인권의 음악활동은 오랜 침체기를 맞게 된다. 그런데 십 몇 년 전쯤 나는 운좋게도 사적인 자리에서 전인권을 마주한 적이 있다. 전인권과 절친한 사이인 시인 김정환이 주선한 술자리에서였다. 그때의 내 느낌은 그가 음악 외적으로는 백치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 순수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었다.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누며 나는 그 당시 한창 이슈가 됐던 이은주와의 스캔들이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이 그렇게 추악한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은 전적으로 황색언론의 분탕질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근 심심치않게 텔레비전에서 전인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집사부일체> 같은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콘서트 7080> 같은 음악 프로그램에 나와 노래도 가끔씩 부르곤 한다.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는 편이지만 어쩌다 유튜브 동영상 같은 걸 클릭해 들어보면, 최악에 가까웠던 전인권의 목 상태도 많이 회복돼 얼추 예전의 파워를 되찾은 느낌이다. 사춘기 시절 그의 음악적 세례를 받았던 사람으로 반갑고도 고맙다. 지금 생각해 보면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우리 대중음악의 황금시대였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나이에 그 시절을 지났던 것을 개인적으로는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10대 후반 들국화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벅찬 감동을 다시 느껴볼 기회가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명작이 다시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 무엇보다 나이 쉰에 접어든 찌든 감수성에서 그런 순도 높은 감정이 솟아나올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 한켠이 싸해진다. 작년인가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으로부터 전인권 콘서트 입장권을 구했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잠시 고민하다 정중히 거절했다. 그 싸해짐을 현실에서 다시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절의 순간, 어쩌면 내 평생 가수 콘서트에 가는 일은 다시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됐다. 역시 마음 싸해지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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