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우리들의 양
양순임이 자신의 고독한 밤 속에서, 마치 길 잃은 우주비행사가 마침내 자신의 모선(母船)을 발견한 것처럼, 실과 친구가 되는 법을 깨달은 그날 이후, 테쉬폰의 공기는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봄의 도래를 알리는 따뜻한 남풍 같은 변화가 아니었다. 차라리, 길고 지루한 장마의 한가운데서 아주 잠시,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비쳤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햇살 한 줌에 가까웠다. 양순임은 이제 실을 끊어 먹지 않았다. 그녀의 베틀에서는 제법 모양새를 갖춘 옷감이, 마치 잊혔던 기억이 되살아나듯 느리지만 꾸준하게 짜여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성공은, 사막에 내린 소나기처럼, 주변의 마른 땅을 모두 적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소녀들의 손은 여전히 거칠었고, 그들의 베틀은 여전히 비명을 질렀다. 실은 여전히 맥없이 끊어졌고, 실패는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테쉬폰 안은 희망 대신, 짙은 패배감과, 서로를 향한 이름 없는 원망, 그리고 양순임의 고독한 성공에 대한 희미한 질투로 채워져 갔다. 그녀는 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베틀만이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이었고, 나머지 모든 베틀은 버려진 무인도처럼 침묵하거나, 혹은 난파선의 잔해처럼 삐걱거릴 뿐이었다.
기술자 이금희는 그 모든 풍경을,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양순임을 자신의 곁에 두었지만, 특별히 칭찬하거나 다른 소녀들에게 그녀를 본보기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녀의 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씨앗을 심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장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싹을 틔워낸 하나의 씨앗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 싹이 과연 이 거친 땅 전체를 푸르게 뒤덮을 수 있을지, 혹은 결국에는 주변의 황무지에 기운을 빼앗겨 함께 말라 죽게 될지. 그녀는 마치 신처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침묵했다.
임피제 신부는 자신의 작은 사무실에서, 그 침묵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양순임이라는 하나의 성공 사례(Success Case)를 확보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 성공이 전체 시스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른바 '규모의 확장(Scale-up)' 단계에서 심각한 병목 현상에 부딪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문제가 무엇일까. 소녀들의 기술 부족? 이금희의 소극적인 교육 방식? 아니면, 이 모든 것의 근원에 있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무언가의 결핍?
그는 축음기에 프로콜 하럼(Procol Harum)의 음반을 올렸다. 1967년, 그해의 공기를 지배하던, 꿈결처럼 몽환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그 노래. 바흐의 칸타타를 닮은 장엄한 오르간 전주가 흐르자, 그는 눈을 감았다. 그는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스템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톱니바퀴 소리, 동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헛도는 벨트 소리. 그는 깨달았다. 엔진은 가동되었지만, 그 엔진에 공급될 연료가 없다는 것을.
소녀들에게는 목표가 없었다. 그들이 짜는 옷감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노동은 목적지를 잃어버린 편지와도 같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 이전에, 자신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실질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였다. 즉, 진짜 양모. 진짜 실. 그리고 그 실로 만들어질 진짜 스웨터. 그는 자신이 소녀들에게 텅 빈 밭을 갈라고만 했을 뿐, 정작 그 밭에 심을 씨앗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은, 몇 달째 아무런 소식이 없는, 바다 건너 아일랜드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있었다. 그는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그리고 시스템의 결함을 정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돈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물었다. "이곳의 소녀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녀들에게 실을 잣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그 실의 근원이 될 좋은 양이 없습니다. 당신들이라면, 이 텅 빈 밭에 어떤 씨앗을 심겠습니까?"
소문은 젖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하게, 한림 장터의 아침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희미한 속삭임이었지만, 생선 비린내와 흙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땀 냄새와 뒤섞이면서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코쟁이 신부가, 또다시 저 멀리 바다 건너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편지를 보냈다더라. 한림수직의 소녀들을 위해 양을 보내달라고, 또다시 손을 벌렸다더라.
장터는 금세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뉘었다. 아낙들은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양이 있어야 우리 딸들이 일을 하지”라며 신부를 두둔했지만, 남자들의 세계는 달랐다. 그날 저녁, 김만수의 선술집은 끓어 넘치는 막걸리 거품보다 더 소란스러운 논쟁으로 가득 찼다.
“대체 언제까지 저 양반에게 기댈 셈인가!” 4-H 클럽 출신의 한 청년이 홧김에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돼지도, 소도, 이제는 양까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이건 구걸이야, 구걸!”
그의 말에, 이제는 제법 주름이 깊어진 한 사내가 맞받아쳤다. “이 사람아, 말이 쉽지! 당장 양털이 없어서 베틀이 멈추게 생겼는데, 그럼 하늘에서 양이 떨어지기라도 기다리란 말인가? 면양이 없으면 스웨터도 없고, 장사도 없어! 다 같이 다시 굶자는 소리야!”
논쟁은 끝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다른 자존심이 싸우고 있었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당장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절박함. 그들은 임피제 신부가 고마웠지만, 동시에 그 고마움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금껏 말없이 술잔만 비우던, 태풍 사라의 밤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지붕을 지켰던 사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대신, 자신의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술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우리가 사면 되지 않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돼지를 팔아 번 돈, 퇴비 공장에서 나온 수익, 그리고 우리 젊은 것들이 푼푼이 모아둔 돈까지. 다 합칩시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육지에 가서 면양을 직접 사 오면 될 것 아니오!”
그의 말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불꽃과도 같았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여기저기서 남자들이 주머니와 품속에서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낡고 땀에 전 지폐, 손때 묻은 동전들이 ‘철컥’, ‘툭’ 하는 소리를 내며 술상 위로 쌓여갔다. 술상 위에는 어느새 그들의 자존심과 희망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뜨거운 열기는, 돈을 모두 세어본 김만수의 깊은 한숨 한 번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들이 모은 돈은, 그들의 자존심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초라했다. 그 돈으로는 고작 대여섯 마리의 양을 사는 것이 전부였다. 수십 대의 베틀을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 선술집 안에는 다시 무거운 좌절감이 내려앉았다.
바로 그 순간, 선술집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곰방대를 털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는 4.3의 광풍과 수많은 세월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남은,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책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말이여.”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왜놈들이 이 섬에 면양을 풀어놓고 키웠었지. 다들 해방되면서 끌고 가고, 남은 것들은 굶어 죽었다고들 했지만… 저 산 너머, 사람 발길 닿지 않는 푸른 풀밭에, 그놈들 중 몇 마리가 아직 살아남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순간, 선술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그들에게, 희미한 북극성처럼 떠오른 유일한 단서였다. 젊은이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우리가 직접 찾아보면 되잖소!”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마을의 젊은이 대여섯 명이 길을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낡은 밧줄과 며칠 치의 보리개떡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노인이 가리킨, 안개에 휩싸인 산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그것은 무모한 모험의 시작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들은 가시덤불에 살이 찢기고, 험한 바위에 발목을 접질려가며 산을 뒤졌다. 밤에는 동굴 속에서 추위에 떨며,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잠을 청했다. 사흘째 되던 날 오후, 그들이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이었다. 가장 앞서가던 청년이, 언덕 너머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그곳에, 그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너른 풀밭 위에서, 대여섯 마리의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들은 제주의 거친 양들과는 다른, 희고 풍성한 털을 가지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야생화되어 털은 군데군데 엉켜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맑고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부터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양들은 사람의 기척을 느끼자, 놀라운 속도로 절벽과 바위 사이를 내달렸다. 청년들은 며칠간의 피로도 잊은 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 뒤를 쫓았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그들은 다섯 마리의 양을 밧줄로 옭아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진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풀밭 위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들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야생의 양들을 끌고 마을 어귀에 나타났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소리쳤다.
“돌아왔다! 그들이 해냈어!”
그것을 시작으로,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낙들은 눈물을 훔쳤고, 아이들은 양들 주위를 신기한 듯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양 몇 마리의 귀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섬사람들이, 처음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들의 결단과 지혜와 실행력만으로 이뤄낸, 위대한 승리의 증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을이 그들의 작은 승리에 대한 흥분으로 아직 들떠 있을 때였다. 한림항에 낯선 기적 소리와 함께, 작은 화물선 한 척이 들어왔다. 임피제 신부 앞으로 온 짐이라는 전갈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부두에 모여들었다. 뭍에서 온 신부의 개인 짐이려니 생각했다.
배에서는 거대한 나무 상자들이 내려졌다. 상자의 틈새로, 희미하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임피제 신부와 김만수가 쇠지렛대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상자 안에서, 마치 구름 덩어리 같은 새하얀 양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평생 보아온 어떤 양과도 다른 생명체였다. 온몸이 눈처럼 희고 풍성한 털로 뒤덮여 있었고, 그들의 눈은 보석처럼 맑고 순했다. 며칠 전 청년들이 산에서 끌고 온, 거칠고 야성적인 양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기품마저 서려 있었다.
“이것이… 제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입니다.”
임피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일랜드의 농부들이, 자신들의 양 떼 중에서 가장 튼튼하고 좋은 놈들만 골라 서른 마리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것은 동정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머나먼 땅에서, 또 다른 섬사람들이 보낸 연대와 희망의 증거였다.
그날 오후, 이시돌 목장에는 기이하고도 장엄한 풍경이 펼쳐졌다. 며칠 전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산에서 잡아 온 다섯 마리의 야생 면양과, 오늘 바다를 건너온 서른 마리의 새하얀 아일랜드 양들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마주했다. 거칠고 강인한 제주의 혈통과, 부드럽고 풍요로운 아일랜드의 혈통. 총 서른다섯 마리의 양 떼. 그것은 한림수직의 미래이자, 이 섬의 새로운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날 저녁, 선술집에 모였던 남자들이 내놓았던 돈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 돈은 이제 고작 양 대여섯 마리를 사는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른다섯 마리의 양 떼를 위한 더 크고 튼튼한 울타리를 짓고, 겨울을 나기 위한 사료를 사들이는, 이 거대한 사업의 첫 번째 종잣돈이 되었다. 공동체의 결단(돈)과, 노인의 지혜(기억)와, 젊은이들의 용기(발견)가, 바다 건너온 온기(원조)와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위대한 성취를 이뤄낸 것이다.
임피제 신부는 그 모든 풍경을, 자신의 작은 거처 툇마루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환호 속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주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때,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기 힘으로 길을 찾아 나서고, 마침내 세상의 길과 만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가 설계했던 시스템은, 이제 그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의지와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