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길이 보이는구나 혹은 달콤한 독
1968년의 겨울은, 테쉬폰의 둥근 지붕 아래,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시간을 흐르게 했다. 그것은 더 이상 실패에 대한 불안이나 막연한 희망 같은, 미래 시제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개의 바늘이 양모 사이를 오가고, 베틀의 북이 날실과 씨실 사이를 가로지르며, 한 코 한 코, 한 올 한 올, 눈앞에 실재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완전한 현재 시제의 시간이었다.
테쉬폰 안의 공기는 변해 있었다. 이전까지 공간을 채우고 있던 것은 기름 냄새와 먼지, 소녀들의 마른 한숨이 뒤섞인 합금(合金)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잘 구워진 빵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냄새와, 끓고 있는 주전자에서 나오는 따뜻한 수증기와, 소녀들의 나지막한 콧노래와, 그리고 양모 자체에서 풍기는 부드럽고 비릿한 생명의 냄새가 채우고 있었다. ‘덜컹, 쿵’ 하고 울리던 베틀 소리의 리듬은 이전의 서툴고 망설이는 듯한 왈츠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의 행진처럼, 혹은 수도원의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절도 있고 규칙적인 리듬으로 공간을 채웠다. 그 소리는 이제 노동의 소음이 아니라, 창조의 음악이었다.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단연 양순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도시의 그늘에 떨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다른 소녀들의 베틀 사이를 천천히 걷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좋은 직물을 한눈에 가려내는 마이스터의 그것처럼, 차갑고 예리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수녀들이 가르쳐준 아란 무늬의 모든 것을, 마치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소녀들의 작업을 감독하고 품질을 검사했다. 그녀의 기준은 혹독했다. 단 하나의 코라도 어긋나거나, 장력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그녀는 가차 없이 다가가 붉은 실로 그 부분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풀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짜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곤 했다. 소녀들은 처음에는 그런 그녀를 원망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지 서툴렀으면서, 이제 와서 유난을 떤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빛 속에서, 자신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완벽함에 대한 집요한 열망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혹독함은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그리고 만들어야만 한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채찍질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모두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양순임은 자신의 모든 작업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장 부드럽고 희미한 광택이 도는, 어린 양의 첫 털로 만든 최고급 양모 뭉치를 꺼내왔다. 이금희가 오래전, 그녀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말없이 내려놓았던 바로 그 털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베틀이 아닌, 뜨개바늘을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뜨개질은, 마치 고행을 하는 수도승의 기도와도 같았다. 그녀는 낮 동안 다른 소녀들의 작업을 돌본 뒤, 모두가 떠나고 난 텅 빈 테쉬폰에 홀로 남아,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밤늦도록 바늘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어부의 밧줄과 풍요의 밭, 그리고 가족의 안녕을 비는 생명의 나무가, 마치 마법처럼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도안을 따라 무늬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 코 한 코 바늘을 움직일 때마다, 부산 공장의 퀴퀴한 먼지 냄새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한기와, 동료 소녀의 싸늘한 죽음과, 그리고 마침내 이곳 테쉬폰에서 발견한 한 줌의 온기를, 씨실과 날실이 되어 촘촘하게 엮어 넣고 있었다. 그녀의 뜨개질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자, 잃어버렸던 자신의 언어를 되찾는 여정이었다.
꼬박 한 달이 흘렀다. 마침내, 그녀는 마지막 코를 꿰고, 실을 잘라냈다. 그녀의 앞에는, 눈처럼 희고 순결한 스웨터 한 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어떤 장신구나 색깔도 더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우주처럼 보였다. 장엄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아란 무늬들은, 마치 오래된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순임이라는 한 인간이,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부터 길어 올린, 그녀 자신의 구원 서사였다.
다음 날 아침, 스웨터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테쉬폰의 모든 베틀과 바늘이 멈췄다. 소녀들과 아일랜드 수녀들, 그리고 이금희까지, 모두가 양순임의 베틀 주위로 숨을 죽이고 모여들었다. 양순임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밤새 완성한 스웨터를 들어 보였다.
아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가 그저, 자신들의 눈앞에 놓인,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결과물에 압도당해 있었다. 로사리아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성호를 그었고, 다른 소녀들은 감탄과 경외가 뒤섞인 탄성을 내뱉었다.
침묵을 깬 것은 이금희였다. 그녀는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다가가, 자신의 거친 손가락으로 스웨터의 표면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뺨을 만지듯, 그녀의 손길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짜임의 균일함을, 무늬의 깊이를, 그리고 스웨터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살아있는 듯한 온기를,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느끼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모두가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스웨터에서 손을 떼고, 양순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누구도 본 적 없는 아주 희미한 물기가 어리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나지막이, 하지만 테쉬폰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길이, 보이는구나."
그 한마디에, 양순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 그녀가 흘리지 못했던 모든 눈물의 결정체였다.
그 스웨터는 한림수직의 첫 번째 '작품'이 되었다. 그것은 팔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테쉬폰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마치 성당의 성물(聖物)처럼 걸렸다. 그 스웨터의 소문은, 겨울의 찬 바람을 타고, 한림의 낮은 지붕들을 넘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퍼져나갔다. 코쟁이 신부가 데려온 양들의 털로, 부산 공장에서 도망쳐 온 계집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짜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조금씩 부풀려지고 신화가 되어갔다.
그 신화는, 마침내 한 남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어느 날 오후, 테쉬폰의 평화로운 창조의 음악 속으로, 낯선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낡고 소란스러운 지프 엔진 소리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테쉬폰 앞에 멈춰 선 차에서 내린 사람은, 한림의 유일한 유지이자 가장 약삭빠른 장사꾼인 최 사장이었다.
그는 태풍으로 임피제에게 참패한 뒤, 전략을 수정했다. 힘으로 저 푸른 눈의 사제를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성(城)은 돌이나 흙이 아닌,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을 무너뜨리려면, 성벽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풀어야 한다. 그는 정보원을 통해 한림의 동태를 살피며, 공동체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가장 효과적인 '바이러스'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바이러스가 될지도 모르는 '첫 번째 스웨터'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사냥에 나선 것이다.
"신부님, 소문이 자자합디다. 계집애들 데려다 놓고 무슨 용한 물건이라도 만들어내셨다고."
최 사장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테쉬폰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은 창고에 쌓인 옷감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의 눈에는 그것들이 그저 미숙한 노동의 결과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저 옷감들이 아니었다.
시선은 이내, 벽에 걸린 양순임의 스웨터 앞에서 멈췄다.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는 장사꾼이었다.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것은 다른 물건들과는 달랐다. 저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래서 더 위험한,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거, 참으로 기묘한 물건이구만." 그는 스웨터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말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헌데 신부님, 이런 건 대체 누가 사갑니까? 예쁘긴 한데, 돈이 되겠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덫이었다. 임피제는 그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최 사장에게 스웨터를 팔기 위한 흥정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다 건너온 양들의 이야기, 부산 공장에서 죽어간 소녀의 이야기, 그리고 이 스웨터의 무늬 하나하나에 담긴, 아일랜드와 제주, 두 섬 여인들의 기도와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최 사장은 팔짱을 낀 채, 미심쩍은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감상적인 이야기. 시장에서는 단 1원도 쳐주지 않을 헛소리. 하지만… 이 순진한 신부에게는 먹히겠군. 이 이야기를 비싼 값에 사주는 척하면, 저 아이들은 자신들의 눈물이 진짜 돈이 된다고 믿게 되겠지. 헛된 꿈을 꾸게 될 거야. 그리고 그 꿈이 깨졌을 때, 절망은 더 깊을 테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스웨터의 무게를 가늠하는 듯 손에 올려보았다. "그래서, 이 '이야기' 값은 얼마를 받으시렵니까?"
임피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 스웨터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들의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액수를 불렀다. 당시 웬만한 공장 노동자의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최 사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는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완벽했다. 가격이 터무니없을수록, 실패의 충격은 더 클 터였다. "신부님, 저를 지금 봉으로 아시는 겁니까? 이 돈이면 일본에서 온 비단 옷도 한 벌 사겠소."
"최 사장님," 임피제가 조용히 말했다. "일본의 비단 옷에는, 우리 딸들의 눈물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서류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고은영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와, 그들 사이에 놓인 비현실적인 가격표를 듣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른 소녀들이라면 이 기적 같은 거래에 환호했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최 사장의 진짜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저 가격은 비정상적이다. 시장 논리에 맞지 않아. 최 사장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 생산 구조, 가격 정책, 유통망… 그는 정보를 사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임피제의 순진함을 경멸했다. ‘저 신부는 감상에 취해, 늑대에게 우리 집의 열쇠를 넘겨주고 있다.’ 그녀의 냉철한 시선은, 곧 벌어질 축제 분위기 속 유일한 불협화음이었다.
최 사장은 임피제의 눈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결심했다. 이 바이러스를 심기로. "…알겠습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눈물 값'이 그리 비싸다면, 한번 사보지요. 대신, 조건이 있소. 당분간 이 스웨터는 나를 통해서만 파는 겁니다. 아시겠소?"
그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돈 봉투를 꺼내, 임피제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은 스웨터 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심장에 심는, 달콤한 독이었다.
그날 저녁, 테쉬폰에서는 조촐한 잔치가 벌어졌다. 소녀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번 돈으로 배불리 먹고 마셨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수줍은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 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그들의 노동과 이야기에 보내온 첫 번째 응답이자, 구체적인 형태를 띤 희망이었다.
임피제는 그 모든 소란을 뒤로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축음기에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Bad Moon Rising>을 올렸다. 경쾌하고 신나는 로큰롤 리듬이었지만, 가사는 불길한 달이 뜨고, 곧 문제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 노래는 지금의 상황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는 오늘, 까다로운 귀부인의 마음을 얻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 사장과의 거래가, 진정한 의미의 '가치 증명'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라, 더 큰 싸움을 앞둔 불길한 전조 같았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소녀들의 순수한 웃음소리 너머, 저 멀리 제주시의 해안선에서, 거대한 유리 요새처럼 빛나는 제주 칼(KAL) 호텔의 불빛이 보였다. 그는 생각했다. 최 사장 같은 지역 상인이 아니라, 저렇게 낯설고 냉정한 세상의 중심에서,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오직 스웨터 한 벌의 가치만으로 평가받아야 진짜 성공이라고.
소녀들의 기쁨과, 그 너머 더 큰 세상의 벽을 보며, 임피제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과제가 무겁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고은영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축제의 불빛 너머, 공동체의 붕괴를 향한 첫 번째 톱니바퀴가, 소리 없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