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노가 남기고 간 질문은, 잔잔한 호수 위에 던져진 돌멩이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작은 파문으로 시작했지만, 그 파장은 임피제의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 그가 애써 쌓아 올린 평온함을 뒤흔들었다. ‘우물 안의 산업’. 그 단어는 밤마다 유령처럼 그의 꿈속에 나타나, 잠을 설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온실의 문을, 스스로의 손으로 열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세상의 비바람 속에서, 이 연약한 꽃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지 증명해야만 했다.
며칠 후, 임피제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서울로 가기로 했다.
그 소식에 테쉬폰은 조용한 흥분으로 술렁였다. 소녀들은 자신들이 만든 스웨터가, 저 멀리 지도에서나 보던 거대한 도시, 서울로 간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그녀들은 가장 잘 만들어진 스웨터 스무 벌을 골라, 낡은 신문지로 한 벌 한 벌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그것은 단순한 상품 포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희망과 자부심을, 미지의 세계로 떠나보내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았다. 양순임은 마지막 스웨터를 가방에 넣으며, 임피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우리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라고,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고은영은 평소처럼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다른 소녀들과 같은 기대나 흥분이 없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또 하나의 감상적인 도박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저 스웨터들의 가치는, 이 섬 안에서만 유효한 신화일 뿐이다. 저 신화가, 과연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냉정한 시장의 논리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녀는 이미 그 결과를 예측하고 있는 듯한, 그런 차가운 표정이었다.
임피제는 소녀들의 희망이 담긴, 묵직한 가죽 가방 두 개를 들고 목포행 배에 올랐다. 배가 항구를 떠나자, 제주의 풍경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만든 안전하고 익숙한 우물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과정과도 같았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는 동안, 차창 밖의 풍경은 계속해서 변했다. 제주의 거친 바람과 푸른 밭은 사라지고, 회색빛 건물들과,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무표정한 사람들의 행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69년의 서울은, 거대한 용광로와도 같았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뒤섞이고,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는 곳. 야망과, 좌절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땀 냄새가, 희뿌연 먼지와 뒤섞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임피제는 이 거대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다시 한번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꼈다. 제주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철저한 고독감이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명동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부와 유행이 모여드는 심장부. 그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신세계 백화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눈부신 조명과, 잘 닦인 대리석 바닥과, 마네킹처럼 완벽한 옷을 입고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 그곳은 테쉬폰과는 다른 행성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구매부 매니저를 만났다. 중년의 신사는 정중했지만, 그의 눈빛은 처음부터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임피제는 가방을 열어, 양순임이 짰던 바로 그 스웨터를 꺼내 보였다.
매니저는 스웨터를 눈으로 훑어보기만 할 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물건은, 나빠 보이지 않는군요, 신부님. 하지만 저희 백화점의 컨셉과는 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미 이번 시즌에 판매할 상품 라인업을 모두 확정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어렵겠습니다."
그의 거절은 너무나 전문적이고, 빈틈이 없어서,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호오(好惡)가 아닌, 시스템의 결정이었다.
임피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백화점과, 명동의 내로라하는 양품점들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답은 거의 똑같았다. 어떤 곳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이런 촌스러운 걸 누가 사 입는단 말입니까?" 어떤 곳은 동정하는 척했다. "신부님, 좋은 일 하시는 건 알겠지만, 여긴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거절이 반복될수록, 임피제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절은 너무나 빠르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일관적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자신을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명동의 한 골목에서, 작지만 오래된 양품점을 운영하는 노신사를 만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스웨터를 직접 만져보고, 짜임새를 꼼꼼히 살폈다.
"물건은… 진짜배기로구만." 노신사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임피제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건, 요즘 세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야."
임피제의 얼굴에 잠시 희망이 어렸다. "그렇다면, 혹시 몇 벌이라도…"
노신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괜한 헛걸음 마시고, 어서 제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며칠 전에, 제주도에서 사업한다는 어떤 힘 있는 양반의 대리인이 다녀갔소. 명동의 웬만한 가게는 다 돌았을 게야. 그 양반이, 곧 일본에서 더 싸고 세련된 스웨터를 대량으로 들여올 거라고 하더군. 그러면서, 제주에서 올라온 다른 촌스러운 물건은, 웬만하면 받지 말아 달라고, 아주 정중하게 '부탁'을 하고 갔지."
노신사의 마지막 말은, 임피제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힘 있는 양반. 제주도. 더 싸고 세련된 스웨터.’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최 사장. 그가 심었던 달콤한 독. 그가 스웨터를 터무니없는 값에 사 간 것은, 헛된 희망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벌고,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서울로 진출할 것을 예측하고, 한발 앞서 이 거대한 시장 전체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쳐 놓은 것이었다. 그는 지금, 단순히 시장의 냉대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적의 교활하고 치밀한 방해 공작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임피제는 남산 근처의 허름한 여관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울의 차가운 공기에 상처 입은 스웨터들이, 묵직한 가죽 가방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희망의 꾸러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순진함과 실패를 증명하는, 무거운 돌덩이와도 같았다.
라디오에선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가 흘러나왔다. 싸움에 지쳐 떠나왔지만, 여전히 싸움은 계속된다고 절규하는 권투선수의 고독한 노래. Lie-la-lie… 의미 없는 그 후렴구가, 마치 자신의 처지를 조롱하는 것처럼 방 안을 맴돌았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울의 불빛은, 그의 절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링 위에 오르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카운터펀치를 맞고 쓰러진 셈이라고. 이 절망적인 소식을, 제주의 소녀들에게, 양순임에게, 어떻게 전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