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조선호텔의 불빛

by 고강아놀자


서울의 밤은, 그가 알던 제주의 밤과는 다른 종류의 어둠을 가지고 있었다. 제주의 어둠이 모든 것을 보듬고 잠재우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다면, 서울의 어둠은 수만 개의 불빛 아래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차갑고 끈질긴 그림자와도 같았다. 임피제는 며칠째, 그 그림자 속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최 사장이 쳐놓은 보이지 않는 그물은 완벽했다. 김 사장이라는 이름의 사기꾼은, 그의 마지막 남은 여비와 스웨터 스무 벌, 그리고 소녀들의 희망까지 모두 가지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경찰서의 낡은 의자에 앉아 횡설수설하는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피곤에 지친 형사는 동정의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매일같이, 수십 명의 사람들이 꿈을 도둑맞았다. 그의 사건은 그저, 수많은 실종 서류 더미 위에 쌓이는 또 한 장의 얇은 종이에 불과했다.

그는 여관방에 틀어박혔다. 돈도, 스웨터도, 희망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방. 그는 자신의 실패를 제주에 알릴 수 없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바다 건너편에서 희망을 짜고 있을 소녀들의 기대는,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는 그 기대를, 자신의 입으로 짓밟을 용기가 없었다. 그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의 낡은 가죽 가방 안에는, 이제 단 한 벌의 스웨터만이 남아 있었다. 서울로 떠나오던 날, 양순임이 특별히 그를 위해 짜주었던, 그의 몸에 꼭 맞는 스웨터였다. 그것은 상품이 아니라 선물이었기에, 차마 김 사장에게 넘기지 못했던, 마지막 남은 그의 온기였다.

며칠이 지나고, 여관 주인이 방문을 두드렸다. 방세를 내지 못하면, 오늘 중으로 방을 빼야 했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제주로 돌아갈 텅 빈 배를 타거나, 혹은 이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무릎을 꿇거나.

그는 마지막 남은 그 스웨터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발길은, 그가 서울에 온 첫날부터 차마 가까이 가지 못했던, 가장 높고 화려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소공동, 조선호텔. 명동의 백화점들이 신흥 귀족을 위한 장소였다면, 그곳은 왕들을 위한 성(城)이었다. 그곳은 대한민국이,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가장 세련되고 완벽한 얼굴이었다.

호텔의 거대한 회전문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문을 통과하는 순간, 종로의 소음과 먼지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잘 조율된 클래식 선율과, 은은한 향수 냄새와, 카펫이 사람들의 발소리를 집어삼키는 고요한 정적만이 그를 감쌌다. 그는 자신의 남루한 행색이, 이 완벽한 공간의 옥에 티라는 것을 느꼈다.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보이지 않는 경멸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로비 한쪽에 자리한, ‘실크로드’라는 이름의 작은 부티크로 향했다. 그곳은 왕비들을 위한 보석 상자 같은 곳이었다.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한복과, 영롱한 빛을 내는 자개함과,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가죽 가방들이, 저마다의 가치를 뽐내며 조명 아래 놓여 있었다.

부티크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마흔 줄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인. 사람들은 그녀를 ‘윤 마담’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단순한 가게 주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작은 공간의 여왕이었고, 물건의 가격이 아니라 가치를 알아보는, 날카로운 심미안을 가진 감정사였다.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맑고 깊어서, 그 앞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임피제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껏 그가 만났던 그 어떤 벽보다도, 높고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부티크 안으로 들어섰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윤 마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심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임피제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뿐이었다.

임피제는 아무 말 없이, 품에 안고 있던 스웨터를 꺼내, 그녀 앞의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윤 마담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위로 움직였다. 그녀는 스웨터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가게에 있는 그 어떤 화려한 물건과도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고 소박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단순함 속에 숨겨진, 비범한 무언가를.

그녀는 장갑을 낀 손으로, 스웨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오래된 고문서를 해독하듯,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짜임의 균일함을, 무늬의 깊이를, 그리고 스웨터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살아있는 듯한 온기를,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느끼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임피제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잊은 채,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윤 마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계로 만든 것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임피제가 간신히 대답했다.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이 정도의 짜임새라면, 적어도 수십 년은 바늘과 함께 살아온 장인의 솜씨일 텐데… 하지만 이 실에서는, 아직 어린 양의 냄새가 나는군요. 기묘한 물건입니다."

그녀는 스웨터를 내려놓고, 임피제의 눈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 옷에는, 이야기가 있군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임피제는, 그 순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서울에 온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가 그의 물건이 아닌, 그 안의 ‘이야기’를 물어온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푸른 언덕에서 온 양들의 이야기, 부산 공장에서 상처입고 돌아온 소녀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거친 손이 어떻게 기도를 엮어내는 섬세한 악기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스웨터를 짜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양순임이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장황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과장이나 감상도 섞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있었던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윤 마담은 그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스웨터와, 임피제의 지치고 절망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사업가였지만, 동시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 스웨터가 가진 진짜 가치를 깨달았다. 그것은 희소성이었다.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진정성'이라는 가치. 그것은 이 시대가, 가장 절실하게 잃어버리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 스웨터는, 팔지 마십시오." 윤 마담이 말했다.

임피제의 얼굴이 절망으로 굳어졌다.

"이것은 당신의 심장입니다. 심장을 팔아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스웨터가 있다면, 제가 팔아드리겠습니다. 위탁 판매 조건으로."

기적이었다. 모든 문이 닫혔다고 생각했던 순간, 가장 높고 단단해 보였던 바로 그 문이, 그의 앞에서 소리 없이 열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만들어 오세요." 윤 마담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정도의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 임피제의 손에 쥐여주었다.

임피제는 부티크를 나와, 몽유병 환자처럼 호텔 로비를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스웨터와, 작은 명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는 다시, 서울의 차가운 거리 위로 나섰다. 하지만 이제, 도시의 불빛은 더 이상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아주 멀리서, 길을 잃은 그를 위해 깜빡여주는, 희미한 등대의 불빛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그는 여관방에서, 제주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는 실패와 사기에 대해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렇게 썼다. ‘서울은 생각보다 추운 곳이구나. 겨울을 나려면, 더 많은 스웨터가 필요할 것 같다.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스무 벌만 더 보내줄 수 있겠니.’

그의 귓가에는, 축음기가 없었지만,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흐르는 듯했다.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위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겠다는 그 장엄하고 성스러운 위로의 노래.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가장 검은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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