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조용히 쌓이는 것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미세한 먼지처럼 내려앉아, 어제의 풍경 위로 오늘의 풍경을 덧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의 색깔과 질감을 바꾸어버리는. 20여 년의 세월이 그렇게 소리 없이 쌓여, 세상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속도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임피제 신부는 이제 아흔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등은 아일랜드의 늙은 떡갈나무처럼 구부정해졌고, 걸음은 느려졌으며, 한때 바다를 담고 있던 푸른 눈동자는 이제 짙은 안개가 낀 새벽의 수평선처럼 희미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시스템도 설계하지 않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은 거처에서, 책을 읽거나, 낡은 축음기로 오래된 클래식 음반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는 이 섬의 풍경 일부가 되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돌하르방이나, 언덕 위의 이름 모를 팽나무처럼. 마을의 젊은 세대는 저 푸른 눈의 할아버지가, 자신들이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의 시작점에 서 있었던 거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성당 미사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아이들을 보면 주머니에서 주름진 손으로 사탕을 꺼내주는, 마음씨 좋은 외국인 할아버지로 그를 기억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왕국에서, 기꺼이 이름 없는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날 오후,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그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방을 나섰다. 그의 곁에는, 이제는 제주의 풍경에 완벽하게 녹아든 중년의 이어돈 신부가, 휠체어를 밀며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임피제가 처음으로 길을 닦았던, 이제는 매끄러운 아스팔트가 깔린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마을을 걸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풍경은, 임피제가 처음 이 섬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그 잿빛의 세계가 아니었다. 한림신용협동조합이라는 간판이 걸린 2층짜리 현대식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건물의 이사장은,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러나 여전히 단단한 눈빛을 가진 양순임이었다. 그녀는 젊은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더 이상 도시의 그늘에 떨던 소녀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병원 앞을 지났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병원 마당의 벤치에는 아이의 링거를 든 젊은 엄마가 햇살을 쬐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때때로, 새로운 생명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울음소리는, 임피제가 평생을 들어온 그 어떤 음악보다도 더 완벽한 화음처럼 들렸다.
그들은 그가 세운 양로원 담벼락 아래 잠시 멈춰 섰다. 안에서는 노인들이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중에는 한때 그를 ‘코쟁이’라 부르며 경계했던 이들도 있었고, 그의 기이한 행적을 비웃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모두, 그가 만든 시스템의 마지막 품 안에서, 평온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임피제는 그 누구에게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그려놓은 설계도가, 이제는 자신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도시가 된 풍경을, 아주 먼 곳에서 온 여행자처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목적지는, ‘정물’이라 불리던 그 언덕이었다.
오르막길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느껴졌지만, 이어돈 신부가 미는 휠체어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그들은 언덕의 정상에 섰다.
그들의 눈앞에, 한림의 모든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처음 보았던 그 잿빛의 황무지는, 이제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지와, 그 위를 하얀 구름처럼 떠다니는 양 떼와, 그리고 저녁 연기를 피워 올리는 수백 채의 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닦인 아스팔트 길 위로는 자동차들이 불빛을 그리며 오갔고, 바다에는 고기잡이배들의 집어등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하늘은 붉은색과 보라색, 그리고 짙은 오렌지색이 뒤섞인, 장엄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임피제는 자신이 이룬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실패와, 무력감과, 그리고 깊었던 고독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이 구원한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미처 구원하지 못했던, 부산의 어느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갔을 부소영이라는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눈가에, 아주 오랜만에, 뜨겁고 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후회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아주 길고 복잡했던 연주를 마친 늙은 연주자가, 마지막 남은 여운 속에서 흘리는, 그런 종류의 눈물이었다.
이어돈 신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겉옷 소매로 늙은 사제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었다.
"신부님." 이어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임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낸 왕국을, 자신의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눈을 감았다.
이어돈 신부는 휠체어를 돌려, 그들이 올라왔던 길을 따라, 다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임피제의 등은 지는 해를 받아, 길고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자신이 세운 왕국을 뒤로하고 떠나는 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다 자란 자식들의 행복한 저녁 풍경을 창문 너머로 잠시 지켜본 뒤,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음을 깨닫고,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늙은 아버지의 뒷모습과도 같았다.
그의 일은 끝났다.
그가 설계한 시스템은, 이제 그가 없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가 남긴 진짜 유산은 저 푸른 초지나, 튼튼한 테쉬폰이나, 심지어는 통장 속의 숫자들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것은, 이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이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불가능에 도전하는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일어서는 법을 기억하는 것.
그 씨앗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의 마음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또 다른 숲을 이루게 될 터였다.
그의 작은 방으로 돌아온 임피제는, 이어돈 신부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이어돈은 낡은 축음기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레코드판 하나를 올렸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Fly Me to the Moon>이었다. 경쾌한 스윙 리듬과 함께, 달콤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Fly me to the moon, Let me play among the stars…
(나를 달로 날려 보내주오, 저 별들 사이에서 뛰놀게 해줘요…)
임피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한 일은, 어쩌면 저 노래와 같았을지도 모른다고. 가난과 절망이라는 중력에 묶여 있던 이 섬 사람들을, 감히 달을 꿈꾸고 별을 노래하게 만드는 일. 돼지를 키우고, 풀을 심고, 돈의 흐름을 만드는 그 모든 과정은, 결국 그들을 저 높은 곳으로 날려 보내기 위한, 서툴지만 집요했던 로켓 발사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음악이 절정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In other words, hold my hand…
(다시 말해, 내 손을 잡아줘요…)
In other words, darling, kiss me…
(다시 말해, 내 사랑, 키스해줘요…)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마치 그가 이 섬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
In other words… I love you.
(다시 말해…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임피제는 그 노래를 들으며, 아주 천천히, 그리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