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던 병실번호는 4번이었다. 5번 방에는 임신 28주 된 언니(아마도)가 있었는데 내가 떨어뜨려 5번 방으로 넘어간 머리띠도 주워주고, 입원 첫 날 충전기도 선뜻 빌려줬다. 남들은 '조리원 동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고위험산모치료실 동기'가 생긴 기분이었다. 물론 나는 그중에서도 의사 선생님들을 고심하게 하는'초고위험 산모'였다.
멘붕이 오다가도 이 모든 게 영원하지 않으므로 입원 생활 중 감사한 것들에 집중했다. 남의 불행을 괜히 생각해 보기도 하고 손발이 온전하고 뱃속 아가들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몰라도 내 몸은 아프지 않음에 집중하며 감사해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병이 걸릴 것 같았다.
내가 마신 물이 아가들에게 직접 공급되는지도 궁금해서 교수님에게 묻기도 했는데, 18주 태아의 양수는 태아가 먹고 또 소변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물 마시는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한쪽으로 누워 있어야 양막 터진 선둥이의 양수가 유지될까 하며 내 몸속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상상하기도 했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태아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에 꼬리뼈에 불이 나도 반듯하게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시험관으로 2개의 배아를 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선둥이가 잘못되더라도 남은 후둥이를 믿고 버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며, 그저 태풍을 만나 잠깐 흔들리는 배를 타고 있다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고 애써 생각했다. 마냥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혹시라도 양수 없는 선둥이가 기적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면 이름을 '하양수'라 짓자며 우리끼리 웃어댔다. 병원에서의 1분 1초는 어찌나 느리게 흘러가던지, 내가 고3 수험생이 된 기분이라 하니 남편은 자긴 총각이 된 기분이라 해서 또 한바탕 웃기도 했다.
선둥이가 태어나는 상상 자체는 우리에게 기적이었지만 희망회로를 돌리곤 했다. 양수 없이 태어난 아기는 폐가 안 좋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나중에 성악이나 관악기 연주 혹은 수영을 가르치자고 했다. 그렇게 선둥이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며칠이 흘렀다.
6월 11일 오후 1시, 입원 6일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다리 사이로 탯줄이 빠져나왔다. 양수가 터진 것이 1차 강도의 멘붕이었다면 내 눈으로 탯줄을 보는 일은 2차 강도의 멘붕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을 힘없는 목소리로 불렀다.
"저기요. 저 탯줄이..." 하고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고 간호사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교수님이 오셔서 초음파를 확인했는데 양막 터진 선둥이의 탯줄이 빠져나온 것이라 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보호자를 부르라고 했고 나는 엉엉 울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게 왼손에 찬 출입증 팔찌는 눈물로 해지기 시작했다.
탯줄이 빠진 것 자체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을 것 같다고 교수님께 얘기했다. 탯줄이 나온 상태로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여전히 선둥이는 우렁차게 심장박동을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끌고 갈 자신이 없었기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바로 그다음 날, 맥도날드 수술로 19주 3일 된 선둥이의 탯줄을 잘랐고, 심장이 멈춘 선둥이는 여전히 자궁안에 있었다.
6월 12일 오후 3시, 입원 7일차
큰 수술은 처음이었다. 척추마취를 하고 진행한 맥도날드 수술은 30분도 걸리지 않았고 생각보다 나는 수술을 잘 견뎠다. 수술 후 교수님은 화장실도 편하게 가고 식사도 잘하면서 이제 후둥이에 집중하자고 했다.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절망의 한 챕터가 지나가고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CBS 새롭게 하소서 간증 영상을 보며 새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