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손톱이 자라나는 걸 보면서 시간이 가는 걸 느꼈다. 그건 침대에 누운 상태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수면용 안대를 끼고 잠을 청하면, 밤 사이희한하고 재미난 꿈을 꾸다가도 새벽 5시에 열과 혈압 체크를 위해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오면 눈을 떠야 했다. 주사약 5개가 주렁주렁 매달린 폴대와 병실번호 '4'가 눈앞에보일 때,'아, 현실이구나.' 하고 다시 이 믿을 수 없는 현실로 걸어나와야 했다.
아침식사는 7시 30분마다 나왔는데 아침을 먹는 건 여전히 내게 사치였고 귀찮은 일이었다. 화장실을 가야 했기 때문인데 몸을 최대한 움직이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아침저녁으로 항생제를 먹어야 했기에, 대나무 줄기를 골라내며 편식하는 판다 러바오 마냥 배 위에 방울토마토 담은 통을 올려놓고 무르지 않은 토마토만을 집어 먹으며 아침 끼니를 때웠다.
지난 주, 맥도날드 수술을하면서 소변줄을 꼽기도 했고,속옷을 벗고 누운 채로 있다가 깔아 둔 패드에 피가 묻어나기도 하다 보니 간호사들에게 아랫도리를 자주 까 보이게 되었다. 이제 뭐 같이 목욕탕 가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허탈한 웃음이 났다.그렇게 감옥 처럼 느껴진 병원에서의 생활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수술 후 후둥이에 집중하기로 했기에 자궁수축억제제인 트락토실, 라보파, 마그네슘을 최대치로 투여받았다. 그중에서 날 가장 힘들게 한 건 마그네슘의 부작용이었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져 숨이 계속 찼고 갈증도 심했는데, 마그네슘을 투여받으며 소변양을 매번 체크해야 했어서 곤욕이었다. 게다가 몸이 축 쳐지고 온몸이 화끈화끈 거리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쌍꺼풀이 무지 진하게 생겼고 내 몰골은 상할 대로 상해 갔다. 그래도 좀 더 버텨서 24주까지 가보자는 생각만 들었다. 상해 가는 몰골을 보며 남편은 이 몰골로 버틸 수 있는 건 '산모' 이기에 가능한 거라고 말했다.
6월 16일 일요일 고열 시작
매일 오전 5시, 밤 10시에 혈압과 열을 체크했다. 일요일 저녁, 면회시간에 온 남편과 같이 있는데 갑자기 열이 38도까지 올랐다. 열이 37.5도가 넘으면 고열로 판단하는데 그렇게 열이 오른 건 처음이었다. 아이스팩을 겨드랑이에 끼고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당직의사 선생님이 왔다.
당직의사 선생님은 '양막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고열이 나는 것과 자궁수축의 주기가 짧아지는 것이 양막염 전조현상이라고 했다. 양막염이 생기면 점차 후둥이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그러면 여지없이 분만을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분만이라니! 너무 무서워서 혹시 제왕절개도 되냐 했더니 19주를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자연분만 만이 방법이라고 했다. 분만을 하더라도 지금 주수에서 후둥이의 생존은 불가능 했다.
양막염을 막기 위해 자궁수축억제제를 최대로 투여해서 자궁수축 주기가 짧아지는 걸 막고 있었는데, 열이 오르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요일 밤, 간호사 쌤이 해열제를 먹으라고 가져다주었고 나는 양막염의 두려움으로 잠을 설쳤다.
6월 18일 화요일, 0시를 넘기며
마음은 아프고 싶지 않은데 몸은 계속 아팠다.신체의 변화는내가 계획할 수 없어 더욱 두려웠다. 자궁수축억제제와 항생제를 투여하고 매일같이 피검사와 균검사를 하면서 팔뚝 여기저기 꽂은 주삿바늘로 인해 멍도 생기고 혈관통도 심했다. 그렇지만 이런 아픔을 내가 버티고 아기를 만날 수만 있다면 다 참을 수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날 밤, 자궁수축이 평소보다 잦아지기 시작했다. 배에 챔피언 벨트 같은 것을 차고 20분 정도 자궁수축을 모니터링했는데 그 주기가 짧아지고 수축 강도가 세졌다.
남편은 어차피 그저 세포였다고, 차라리 덜 아플 때 신호가 와서보내주는 게 효자라고 얘기했다. 순리대로 해야 한다는 주치의 교수님 말에 우리는 다가올 이별을 좀 더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망과 희망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후둥이 마저 보내줘야 하는 신호가 몸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밤 사이, 후둥이를 보내줘야 하는 확률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그저 그 고통을 너무 오래 끌지 않게 축복해 달라는 이기적인 말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