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기간 20주 동안 우리 가족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던 쌍둥이 형제를 하늘로 보내주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3일을 더 입원하며 염증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매일 피검사로 체크했다. 밤 사이 훗배앓이를 하고 추스려지지 않는 마음이 괴로워 4인 병실에서 혼자 숨죽여 엉엉 울기도 했다. 주삿바늘을 하도 꽂아서 이제 피검사는 무섭지 않았는데 마음은 계속 아려왔다. 염증수치가 120에서 28까지 염증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분만 후 3일 째 되는 날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매일 두 차례 방문해 주신 주치의 교수님은 괜찮냐고 물으러 왔는데 그 때 마다 질질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서 괜히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교수님은 흔치 않은 일을 겪긴 했지만 만약 약물의 강도를 높이고 버텼더라도 이미 염증이 생겼기 때문에 얼마 끌지 못했을 거고, 혹여 낳더라도 뇌성마비가 있거나 폐 성숙이 덜 되어서 그 또한 고생스러운 일이 생겼을 거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헛헛했다.
6월 19일 저녁
19주 이후 사산은 아기를 화장하고 장례를 치뤄야 한다고 해서 남편이 그 절차를 지켰다. 분만 당일, 남편은 보자기에 쌓인 아기를 한번 안아봤다고 했다. 그 때 처음으로 부성애라는 게 느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분만 후 다음 날 저녁, 앞에 '故 연고 고' 자가 붙은 김OO 아기 1 ,2 라고 쓰인 팻말과 함께 아기들은 화장터에 들어갔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남편. 한 줌의 유골로 남았고, 유골을 빻는 일까지 하면서 남편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먼저 간 선둥이보다 조금 더 있던 후둥이의 뼈가루가 훨씬 많이 나왔다고 했다. 만약 나도 화장터에 함께 갔더라면 아마 울다가 실신했을 터였다. 그래서 분만 후 모든 장례 절차에는 보통 아빠만 동행한다고 했다.
남편이 보내 준 화장터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오열
6월 22일 아침 8시반
한 줌의 유골로 남은 아가들은 하얀 보자기로 봉합된 유골함에 담겨 있었다. 퇴원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나비정원이라는 곳에 유골을 뿌리러 갔다. 떠나기 전 남편과 나는현관에서유골함에 손을 얹고 울면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