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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Sep 07. 2020

한때 나를 갉아먹은 기억 떠올리기

그리고 이곳에 버리기

#1 유치원 시절


다 같이 역할 놀이를 하는 날이었다. 각자 역할이 주어졌고, 끼리끼리 그룹을 지었다. 아이가 가고 싶었던 팀의 대장격인 아이는 다른 남자아이를 데려갔다. 그날이 담긴 사진 속에서 아이는 역할놀이에 집중해서 해맑게 웃고 있지만, 그때는 처음으로 아이가 속할 데가 없다는 느낌을 받은 날이었다.


#2 초등학교 2학년


발표를 마친 아이는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아이가 의자 위에 뭔가를 놓았다. x침 같은 장난이었다. 열 받은 아이는 옆자리 아이를 때렸다. 둘은 담임에게 혼났지만 직접 폭력을 행사한 아이가 더 혼났다.


아이의 엄마는 학부모위원이었다. 직장생활에 바빴지만 학부모 모임 참석도 하고 돈을 모아 반에 필요한 물품도 샀다. 담임은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는 자그만 라디오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들을 위한 책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엄마와 라디오를 샀고, 어머니들은 논의해서 책도 샀다. 그건 담임의 캐비닛과 커튼으로 가려진 책장에서 나온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는 담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3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발표를 좋아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질문을 하면 발표를 하겠다고 거의 대부분 손을 들었다. 아이의 라이벌 같은 또 다른 아이 한 명이 있었다. 둘이 손을 들면 담임은 그 아이를 더 자주 호명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자주 학교를 찾았고 담임과 소통했다. 아이들은 촌지가 뭔지, 차별이 뭔지 알았다. 어느 날 담임이 던진 질문에 아이만 손을 들었다. 라이벌은 가만히 있었다. 아이는 거의 가운데 줄에 앉아있었다. 담임은 아무도 호명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때 처음 무시당했다는 걸 느꼈다.


#4 초등학교 6학년


따돌림은 유행처럼 번졌다. 아이들은 무리 지어 놀면서 그 안에서 차례대로 한 명씩 따돌렸다. 아이는 첫 번째 대상이었다. 교실로 들어설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책상 위에 욕설이 적힌 종이가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몰아세웠고, 자신들이 상처 받았다고 주장했다. 무서웠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지만, 무신경했던 자기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였기에 아이는 그 무리에 더 이상 속하지 않았으나, 그 무리 내의 따돌림은 계속되었다.


담임은 방관했다. 알았어도 아무란 행동을 안 했다는 게 문제, 몰랐다면 담임이 몰랐다는 게 문제인 상황이었다. 결국 한 아이의 부모가 학교를 찾아오고 무리를 찾아내려는 담임의 조사가 진행되었다. 아이도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한때의 당사자로 서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깊이 마음을 주지 않은 건.


#5 그래서 청소년


아이가 믿는 만큼, 순수한 만큼, 좋아하는 만큼 상대방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좀 더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했으면 좋으련만,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다른 아이들의 생각이 무서웠고, 자신의 뒤에서 어떤 말들이 오갈지 신경 쓰였다. 싫어도 좋은 척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강한 아이의 비위를 맞추고, 센 무리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이들과는 멀어졌다. 애초에 만날 수 있었는지, 아이의 운명에 그런 인연이 존재했는지 알 수 없다.


홀로 자신만의 길을 가는 듯하다가도, 무리에 속하기 위해 발버둥 쳤고, 주목받고 싶어 했고 뭐든 잘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게, 따라올 수 있게,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무리 속에서 웃고 있어도 또 눈치를 보고 듣기 좋은 말을 하며 한없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또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들곤 했다. 아직 단단해지지 못해서, 자신의 세계와 잘 나가는 무리 그 사이를 수없이 오가다 지쳐 땅을 파고드는 건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Photo by Atharva Tuls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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