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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네 개의 나이가 있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 이후

by 비단구름

▣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 이후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 이후로 누군가에게 나이를 얘기해야 할 때면 아주 잠깐 헷갈리기 시작한다.

‘몇 살이라고 해야 하는 거지?'

'28살?'

'생일 지나지 않았으니까 26살?'

'한국식 나이?'

'만 나이?’


그래서 때론 되물으며 확실하게 한다.

“한국 나이 말씀하시는 거죠?"

"만 나이로 말씀드리면 되나요?”


'태어난 연도를 말하면 되는 건가?'


"저는 1998년 생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하다.


2023년 6월 28일, 일상에서 나이로 인한 혼란이 줄어들 것이라는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다고 했을 때 좀 의아했다.

문서나 술 담배 구매, 운전면허 취득, 선거권 행사 같은 법적 권리에는 이미 만 나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나?

일상생활에서도 만 나이를 사용하라는 것인 거지?


티브이를 볼 때면 출연자들의 이름 옆 괄호 안에 표시된 나이를 보면 궁금함이 일곤 한다.

방송이니까 만 나이로 표시했겠지?

한국인데 한국식 나이로 표시했겠지?


헷갈린다. 헷갈려.


▣ 우리나라에는 네 가지의 나이가 있다.

1. 한국식 나이(세는 나이)

태어나자마자 한 살. 12월 31일에 태어나도 한 살.

예: 1990년 12월 31일 태어난 은주---> 은주는 한국식 나이로 36살

계산법: 2025-출생연도+1


2. 만 나이

태어나면 0살. 생일이 지나야 한 살.

예: 1990년 12월 31일 태어난 은주---> 은주는 만 나이로 34살(생일 지나지 않은 경우)

예: 1990년 12월 31일 태어난 은주---> 은주는 만 나이로 35살(생일 지난 경우)

계산법: 한국식 나이-2(생일 지나지 않은 경우)

한국식 나이-1(생일 지난 경우)


3. 연 나이

생일 상관없이 해가 바뀌면 한 살.

예: 1990년 12월 31일 태어난 은주---> 은주는 연 나이로 35살

계산법: 2025-출생연도

(*올해 몇 살이 되는지, 가 포인트)

4. 빠른 나이

생일이 1월, 2월인 사람들에게 적용되던 나이.

예: 1990년 1월 1일 태어난 은주---> 1989년 생들과 친구?

예: 1991년 1월 1일 태어난 은주---> 1990년 생들과 친구?

요즘은 빠른 나이를 많이 따지지 않지만 빠른 나이를 적용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내 주위에만 해도 빠른 생들이 수두룩하다.


▣ 법제처 포스터에 표기한 문답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Q: 친구끼리도 생일에 따라 나이가 달라질 수 있는데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만 나이에 익숙해지면, 한두 살 차이를 엄격하게 따지는 한국의 서열 문화도 점점 사라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법제처의 답 문자에서 중요한 부분은 ‘한두 살 차이를 엄격하게 따지는’‘한국의 서열 문화도 점점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는 부분이다.

법제처의 답을 보고 ‘한두 살 차이를 엄격하게 따지지 말라’는 뜻으로 오인하는 것은 곤란하다.

한 문장으로 보이는 이 문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향점은 이것이다. ‘한국의 서열 문화가 점점 사라질 것으로 기대’.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 잘 되고 있나?


이것은 참 묘하다.


▣ 친구 사이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나보다 한 살 적은 지인이 있는데, 우리 둘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 몇 살이냐고 물으면 그 친구는 나이 대신 꼭 이렇게 답했다.

“몇 달 차이 안 나요.”

진짜 어지간히 싫은가 보았다.

악착같이 가까워지려고 하는 거 보면.


반면 나보다 두세 살쯤 많은 지인은, 심지어 한 살 많은 지인조차도, 내가 약속 장소에 걸어왔다거나, 걷는 게 좋다거나, 불면증이 없다거나, 화장실을 자주 가지 않는다거나, 잘 먹는다거나, 하면 나에게 꼭 이렇게 말한다.

“너 아직 어리구나. 이야! 넌 아직 젊다, 젊어!”

진짜 싫은가 보았다.

악착같이 멀어지려 하는 거 보면.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는 지인은 나보다 한 살 적었다.

그녀는 말 편하게 하라고 해도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사용했다.

말 편하게 하라고 해도 한 살 차이에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그녀를 보며 그러는 편이 그녀 마음이 편한가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작년 즈음에야, 알고 지낸 지 이십 년이 다 돼가서야 그녀가 지나가듯 말했다.

“저 사실은 1월 생이에요.”

십 년 넘게 언니, 동생으로 지냈는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우리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에 갇혀 있는 걸까.


오래전 직장 다닐 때 한 살 위인 언니가 있었다.

못되게 구는 것은 아니었지만 쌀쌀했다.

곁을 줄 마음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유독 그녀에게서 ‘군기’라는 냄새를 느꼈는데 그만둘 때 알았다.

그녀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녀는 '빠른' 이었다.

직장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그녀의 뾰족한 표정과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서늘한 냄새를 기억한다.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것은 무얼까.


▣ ‘만 나이 통일법’은 나이차가 적을수록 서로 불편한 거 같다.


만 나이 통일법을 시행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아주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오른다.


내가 언니일 때, 내가 동생일 때,

내가 언니와 친구가 되는 것, 동생이 나와 친구가 되는 것.

무엇이 이득이고, 무엇이 손해인가.

나에게 어떤 것이 이득이고, 어떤 것이 손해인가.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 지 이 년 여가 돼가는데 사람들은 일상에선 여전히 한국식 나이로 생활하는 것 같다.

미세하게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도 점차 나이를 묻지 않는 것 같다.

올해 새로 시작한 모임이 있는데 열 달이 다 되도록 나에게 나이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만 나이 통일법’의 예상 밖의 순기능일까.



▣ 우리가 밟고 있는 계단은 끝이 없다.


언니와 동생, 형과 동생 대신, 누나와 오빠 대신,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관계를 맺는 순간 서로에 대해 감정과 존중을 담아야 하는데 우리는 관계를 맺는 순간 있어야 하는 위치가 정해진다.


‘만 나이 통일법’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호칭에 포함되어 있는 서열을 저 멀리 보내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 여러 가지 갈등 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원인으로 지목된 한국 사회의 지독하게 경직된 서열 문화가 ‘만 나이 통일법’을 시행한다고 사라질 수 있을까.


몇 층까지인지 보이지도 않는 계단에 서 있는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못 부른다.

계단에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보니 서로 눈을 맞춰 대화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눈높이를 맞추려면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내려오거나, 올라가거나.

계단은 한 사람만 겨우 서있을 만큼 좁아서 여럿이 함께 서있는 것도 쉽지 않다.


‘만 나이 통일법’ 이후 우리는 서로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많이 좋아하는, 만날 때마다 좋은, 대화도 잘 통하는, 계속 잘 지내고 싶은, 나보다 불과 몇 달 늦게 태어난 그녀를 떠올리는데...

나 정도면, 이만하면, 꽤 수평적이고 평등한 사람이라는 건 대단한 착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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