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슐만의 사진전, '어노니머스 프로젝트'
문득 예전의 어떤 경험을 추억하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예상치 못하게 찾아들곤 합니다. 꼭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고독이나 외로움은 아닙니다. 황동규 시인이 언젠가 '홀로움'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는데, 그런 홀로움에 가까운 감정일까요. 즐거운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때의 기억과, 분위기과,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채웁니다. 왠지 먹먹한 기분과 함께 마음 한 구석이 꽉 막힌 기분이 듭니다. 무언가가 그 곳을 채웠다기보다는, '어느 한 구석이 텅 비어 있음으로 꽉 찬' 기분입니다.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 본 말일지도 모릅니다. 요즘에는 '멀티 페르소나'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사회생활은 가면을 쓰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는 나는 하나의 나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하는 자식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고, 또 동시에 누군가의 사랑하는 연인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관계에서의 나의 모습은 서로 놀랍도록 다릅니다. 오롯이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집에서 밤에 글을 끄적이는 나의 모습과 바깥에 나와 혼자 산책을 하는 나의 모습마저 같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내 모습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곧, 각기 다른 수많은 나들이 합쳐진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에 재미있는 말이 있었습니다. 잊혀지는 것은 곧 죽어버리는 것과 같다. 위에서 말한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내가 죽으면, 곧 다른 사람들의 관계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이 같이 죽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관계 속에서 내가 잊혀지는 것은 수많은 내가 하나씩 죽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연인과 이별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누군가에게 잊혀지고, 누군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너와 나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나의 안에 있는 너와 너의 안에 있는 내가 동시에 죽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리 슐만의 사진전에 다녀왔습니다. 리 슐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사진은 인류가 개발한 기술 중 가장 다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그대로 기록해서 그것이 잊혀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추억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일까요.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어쩌면 잊혀져 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기억을 끄집어내서 그 순간의 내가 죽어버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사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다정한 기능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