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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일스팟 Jun 24. 2022

억울하면 네가 선배 하든지

사관학교 생활와 '라떼'의 의미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생도들은 1달 동안 기초군사훈련을 받습니다. 물론 9년 전의 저도 그 1달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제까지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입었던 옷은 과잠이 아니라 전투복이었고, 선배들은 저를 이름이 아닌 '메추리'라는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대학교이기도 하면서 군대이기도 한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학교인만큼, 사관학교에 제가 상상하던 캠퍼스 라이프는 없었습니다. 기초군사훈련 한 달만에 저는 그 전까지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관학교는 특히 1학년들에게 가혹한 곳입니다. 1학년들은 하루 종일 땀이 마를 새가 없거든요.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는 목이 터져라 번호를 붙였고, 식사 후에는 아침저녁으로 생활관(기숙사)에 있는 공공시설을 청소했습니다. 2학년 선배들은 세면대에 물방울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소리를 질러댔고, 우리는 먼지 하나라도 남아있을까 마른 걸레를 들고 바닥을 기어다녔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집합해서 기합(우리는 그것들을 '특별훈련'이라고 불렀습니다)을 받는 덕분에 일주일 중 절반은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땀범벅인 채로 잠에 들었습니다. 특별훈련을 받는 대부분의 이유는 '선배에 대한 예의와 동기생애가 없다' 내지는 '품행이 불량하다'였습니다. 1학년이 감히 이를 보이고 웃어서, 동기가 지적을 받고 있는데 감히 그 옆을 걸어 지나가서, 왁스로 머리를 예쁘게 넘겨 손질하지 못해서 등등.


밖에서 보는 생도들의 모습은 발이 보이지 않는 백조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부족하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했기 때문에 선배들이 선의로 우리를 가르쳐주고 있다구요. 물론 대부분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 소위 말하는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에는 불합리한 행동들도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선배가 되면, 후배들에게 이러지 말자. 우리가 당했던 일들은 우리 기수에서 끊자"라고.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요즈음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치체(治體)를 잘 아는 자는 적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여 경학을 버리고 녹리(祿利)를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조종(祖宗)께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의이겠는가?


쉽게 말하면,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것들은 갈수록 참 버릇이 없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건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또 어느 시대를 보아도 이런 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끔은 어떻게 보면 이중잣대와 자기모순이 우리들의 사회적 본능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한 예수가 지금까지도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땐 말이야'도 시대 불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학년이 올라가는 것이 곧 특권을 가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1학년 때는 그렇게 선배들에게 불합리한 지적을 받으면서 괴로워하다가도 내가 선배 생도가 되었을 때 1학년을 보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된다 식의 지적이었습니다. 고학년이 된 동기들은 '어딜 감히 1학년이, 메추리가 미쳤네' 하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건 아마 '나는 저학년 때 이렇게 힘들었는데 감히 너희가 이렇게 편하게 생활하냐'는 식의 보상심리에 가까웠을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매번 선배에 대한 예의라는 핑계를 대며 후배들을 지적했습니다. 다행히 그 와중에 몇몇은 동기들이 후배들에게 내로남불식의 지적을 할때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우리가 1학년 때 했던 다짐들을 상기시켜 주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친구들의 의견이 항상 수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때가 관계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했던 시기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아무렇게나 말하기에는 내 말과 행동에 실린 무게가 너무 큰 것 같았거든요. 후배들 앞에서 한없이 어른인 척을 하면서 나는 과연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반대로 만만한 선배가 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오글거리지만, 개개인의 좌우명을 적어 간직하는 소지품인 '신표'에도 그 문구를 새겼었습니다

그 때 제가 내린 결론은, '책임과 자격'이었습니다. 말하기 전에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는지 한 번 더 생각하고, 뱉어버린 말에는 책임을 지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저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닮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나는 나중에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보기 싫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나중에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식이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제 고민의 깊이로는 그만큼의 표현과 노력이 한계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명언을 남긴 사람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여러 명 있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제 명함지갑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는 말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변에서 아저씨 같다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건 대학교 때 고민했던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한 일종의 노력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사관학교 생활이었지만, 고민의 결과물을 놓아버리지는 않겠다는 그런 다짐이라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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