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갈망하는 이유는 열정과 가능성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배경 : 젊게 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에서 40대를 향한 시선은 미묘하게 비틀려 있다. 젊음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희화화되고, 자신을 가꾸는 행위는 “영포티(Young-Forty)”라는 조롱 속에 묻힌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늙지도 젊지도 않은 세대로 취급되는 이 모순이 불편했다. 이 글은 오늘날 40대를 둘러싼 ‘젊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한 기록이다.
40대가 되면 국가가 부여한 의무 대부분이 끝난다. 민방위 소집도 끝나고, 사회가 요구하는 ‘국가적 역할’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내가 자라던 시절, 그 나이의 아버지들은 이미 가정과 사회의 중심이었다. 공자가 말한 불혹은 흔들리지 않는 나이였다. 그러나 지금의 40대는 그때와 많이 다르다.
우리는 IMF외환위기 여파로 인한 취업난을 겪었고, 부동산 폭등기에는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잃었다. 결혼과 육아, 교육비와 부채가 뒤섞인 현실에서도 묵묵히 버텨왔지만, 사회정책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 청년정책에서는 제외되고, 노년정책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서성이는 세대가 되었다.
그래서 40대에게 젊음은 단순한 외모의 미학이 아니다. “나는 아직 유효하다”는 신호이자,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생존의 언어이다. 젊어지고 싶은 욕망은 허영이 아니라, 쓰임새를 향한 마지막 몸짓이다. 그들에게 젊음은 가능성의 추억이며,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자기 방어다.
40대는 버티기 위해 애쓴다. 운동을 하고, 자기 관리를 하고, 퇴근 후에도 회사의 일을 붙든다. 하지만 그 모습은 더 이상 칭찬받지 못한다. 책임은 늘었지만 권한은 없고, 경험은 충분하지만 기회는 부족하다. 노력은 인정되지 않고, 삶은 ‘라떼’로 비하되며, 존재는 ‘영포티’라는 말로 희화화된다.
한동안 온라인 담론의 중심에는 성별 갈등이 있었다. 남녀의 대립이 피로해지자, 사회는 새로운 희생양을 찾았다. 2030에게 50대는 부모 세대라 비난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중간, ‘아직 조언하려 드는 것 같고, 그렇다고 완전히 기성세대로 보기도 애매한 세대, 만만한 형’, 40대가 새로운 화살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영포티라는 용어는 원래 「라이프 트렌드 2016」이라는 책에서 “젊음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투자하는 중년 세대”로 시작되었지만, 트렌드는 얼마 가지 못했고 경제적 압박과 사회적 피로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2020년 이후 문화의 주도권이 MZ세대에게 넘어가고, 정치적 세대 갈등이 격화되면서 40대는 문화에서도, 정치에서도, 중간에 낀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영포티라는 말은 외부의 조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40대 스스로의 불안도 들어 있다. 젊게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만, 때때로 그 욕망은 과잉의 형태로 드러난다. 나이는 40이 넘었지만 여전히 20대의 언어를 쓰고, 자기 삶의 무게를 부정하듯 젊음을 흉내 내는 행동은 단순한 트렌드 추종이 아니라,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리적 저항일 수도 있다.
나도 이미 40대다. 나이를 실감한 순간은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바뀌어 있음을 체감했을 때였다. 기저귀를 갈아주던 조카 놈이 어느 순간 나를 “꼰대 세대”로 취급하고, 함께 식당을 갔던 여자친구가 내 딸로 오해받을 때, 나는 비로소 시간이 나에게 남긴 흔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염색을 하고, 옷차림을 바꿔보고,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조차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은 더 서글펐다. 영포티라는 조롱은 결국 시대의 징후다. 자립하지 못한 세대의 불안, 늙음을 두려워하는 사회의 피로, 여전히 쓰임을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겹쳐 만들어낸 상징이다.
젊음을 갈망하는 것은 허영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절실한 생존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얘들아, 우리는 그저 인정받고 싶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그리고, 너희도 곧 나이를 먹을 거야, 그러니 제발 너무 우리를 조롱하지 말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