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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Aug 08. 2020

공황장애를 극복시킨 플라워 케이크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준 것

'제왕절개'

나는 두 아이를 모두 제왕절개술로 출산을 했다.

자연분만술로 아이를 낳은 산모들의 후기담을 들으며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나는 아이에게 미안했고 못내 속상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하늘이 노래질 즈음에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으며 고진감래의 눈물을 흘렸고, 이내 자신의 가슴 위로 올라온 아이에게 첫 젖을 물리던 순간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했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수술대에 올라 전신마취가스를 흡입했고, 그 길로 세상과 단절된 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몸에서 새 생명이 분리됨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 역시 절개의 아픔을 참아 고진감래의 눈물을 흘렸고,  한 달 같았던 사흘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첫 젖을 물리며 심장의 뜨거워짐도 느꼈다. 그러나 애끓는 모정은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나 보다.  


나는 둘째의 출산 때도 마찬가지로 제왕절개술을 받았는데, 첫째 때와는 달리 하반신 마취를 선택했다. 하반신 마취를 하면 수술 내내 깨어 있기에 갓 태어난 아이를 만날 수 있단다. 나는 꼭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뜨거운 가슴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리라 다짐했다. 결론은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었고 젖도 물리긴 했다. 하지만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가슴을 내어줄 영혼이 없었다. 과다출혈로 인해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탓이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수술실 천장이 뱅글뱅글 돌던 그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보호자인 남편과 친정엄마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수술 도중의 수혈에 관한 동의서 작성과 함께 나는 응급수혈을 받았다.




'공황장애를 겪는다는 것'

내가 출산에 관한 긴 이야기를 꺼내 든 이유는 바로 이 시점부터 내 삶이 고달파졌기 때문이다.

출산 시 과다출혈로 인해 사망하는 산모들도 있을 만큼 나는 꽤 위험한 순간을 겪었다. 나는 그때 내 생명의 줄을 놓지 않은 대신 공황장애라는 무서운 병을 얻었다. 대체로 배에 가스가 차서 배가 몹시 아픈 경우 가차 없이 공포감이 밀려왔다. 배가 아픈 일이 출산의 기억과 맞물려 부정적 감각의 세포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복통만으로 증세가 국한되었다면 다행이었을 터인데, 나는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치과에서 소공포라 불리는 초록색 천을 얼굴에 덮고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1분도 채 되지 않아 "저, 죽을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제 얼굴을 덮지 말고 해 주세요."라는 뜬금포를 던지고는, 내 민낯의 모공과 일그러진 몰골을 드러낸 채 차갑고 뜨거웠던 액체와 조명을 한껏 받아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용실을 가는 것,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는 것, 높은 건물에 올라가는 것, 비행기를 타는 것, 운전하는 것 등 사소하게 넘겼던 평범한 일상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공황장애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눈 앞은 깜깜해지고 머릿속은 하얘져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공황장애의 한 증상이라는 언어장애가 오고야 만 것이다. 나는 휴직을 해야 했고, 가족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것을 힘겨워했다. 그렇게 약 3년을 보냈다. 그러다, 곧고 선량한 마음을 지닌 남편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용기를 내어 새로운 환경에 조금씩 나를 내보내는 시도를 했다.




'플라워 케이크와의 인연'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

환하게 웃으시는 어느 할머니 앞에 자그마한 플라워 케이크가 놓여있는 사진이었다.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던가.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싶은 인연이 있듯이, 나는 그렇게 그 사진 한 장에 매료되어 무엇에 홀린 듯 그 길을 찾아 나섰다. 할머니를 미소 짓게 만든 그 플라워 케이크를 찾아서.


아직도 첫 수업을 생각하면 손끝이 저릿한 느낌이다. 자그마한 공방의 한편에서 낯선 이와의 만남에 나는 어김없이 긴장감이 밀려왔고 몇 번이나 눈 앞이 깜깜해짐을 겪었다. 그러나 세심하게 표현해내야 하는 케이크의 꽃 만들기 작업이 나의 정신을 곧게 잡아 주었고, 내 손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마주하는 일은 불안을 강한 희열로 승화시켜 주었다.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꽃과 케이크 만들기 연습에 몰두했다. 만든 플라워 케이크를 가족과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행복을 되로 받아오곤 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내던졌다.


오랜 기간 가르치는 일을 해 온 나는 누구보다도 남들 앞에 서는 것에 자신이 있었건만, 공황장애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런 내가, 어느 날 홈 클래스를 열겠다 다짐했다. 공황장애를 겪고 있던 나에게 어디서 그런 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등줄기에 땀이 서린다. 낯선 이와 마주 앉아 아직 전문가이지도 못했던 내가 케이크 만들기를 가르쳤다니. 수없이 연습을 했지만 실전은 또 달랐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일 때면 손끝 발끝이 저려왔고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수업이 하나씩 더해가는 사이 내 마음도 점차 단단해져 갔다.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준 것'

나는 줄곧 꿈꿔왔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기를. 내 재능이 미치지 못해 남을 도울 수 없다고 말했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미혼모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무엇이든 돕고 싶다고 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은 서로를 돕고 있었다. 도울 수 있는 여석이 없을 만큼. 세상은 따뜻했고, 더더욱 그 따뜻한 기운에 내 몸을 담그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나는 몇몇의 미혼모센터로부터 삶이 풍요로워질 기회를 얻었다. 아가들의 백일잔치에 쓰일 백일 떡케이크와 미혼모들의 생일 케이크를 맡게 된 것이다. 내 자리가 있음에 감사했고 가슴이 벅찼다.            


누구나 슬픔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가지만, 같이 아이를 키우는 입장으로서 부(父)의 부재 속에서 치러지는 백일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시렸다. 정성스레 그들의 날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특히 백일잔치 케이크는 그 어떤 작업보다 더욱더 정성을 기울였다.

일백 백의 한자가 곱게 수놓아진, 아이를 닮은 순백의 설기에 꽃을 과하지 않게 더했다. 옛날 사람들은 백일떡을 백 사람에게 나눠야 장수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 믿음에 마음이라도 쓰듯 설기 한 단을 더 올려 2단으로 만들었다. 최대한 더 많이 나눌 수 있게.


그들이 나의 케이크를 앞에 두고 울고 웃는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나도 함께 울고 웃었다. 그들이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말할 때 나는 더 고맙다고 말했다.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나는 실로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의 공황장애 증상은 놀랍게 사라져갔다.


                       

그날의 기억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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