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미순의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치매 부모를 간병하고 돌보는 자식의 일상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아파트 옆 호에 나란히 살며 비슷한 듯 다른 사연을 간직한 이혼한 중년여성과 20대 청년이 스토리의 중심이다.
이혼 후에 함께 살던 치매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례도 치르지 않고 시신을 집안에 모신 채 어머니의 노령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40대 여성의 일상이 한 축이다.
자신 또한 식당일을 하다 입은 화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지독한 생활고에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선택했다.
대리운전과 아버지의 노령연금으로 치매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가는 20대 청년의 일상이 스토리의 또 다른 축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돌보느라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제대로 된 직업도 얻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공교롭게 이 청년의 아버지도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에 사망하게 된다.
그때 옆 호의 여성이 망연자실한 청년을 설득하여 자신의 어머니처럼 처리하자고 한다.
암울한 현실에서 실의 빠진 청년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우연히 그녀는 어머니가 생전에 아무도 몰래 마련해 둔 시골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살기로 작정하고 청년과 함께 두 시신을 그곳으로 옮겨 암 매장하려고 이사하는 장면이 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얼핏 범죄 소설 같다.
하지만 스토리의 초점은 병든 부모를 간병하면서 겪는 자식의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상황을 그려내는 데 모아진다.
포기하고 싶고 훌훌 떨쳐 내고 싶지만 차마 천륜적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자식의 피폐한 삶을 조명한다.
간병하는 가족의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양가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작가는 용기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팍팍한 사람들에겐 장수가 축복이라기보다는 재앙이나 저주가 아닐까 가끔 생각해 본다.
제일 안타까운 사람은 심신이 온전치 못한 노부모 자신이다.
하지만 제 삶을 꾸려가기도 벅찬 가족이 간병과 돌봄을 고스란히 떠안는다는 것은 형벌 같은 고통일 수도 있겠다 싶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간병의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혼란과 심리적인 갈등은 돌보는 사람의 삶을 정지시키고 서서히 갉아먹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식은 병든 부모님을 제대로 모셔야 한다는 천륜의 의무감을 감내하며 살아가지만, 어린아이로 변해버린 부모님의 투정과 성화, 예기치 못한 사고가 끊임없이 현실적 인내의 마지노선을 드나들게 한다.
이 소설에서도 두 주인공은 인내의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패륜적 상상을 한다.
소설 곳곳에 나오는 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적지 않은 공감이 일었다.
아버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어두운 골목을 지나오면서 준성은 몇 번이고 이대로 저 시멘트 벽에 아버지의 머리를 박아 짓이기는 상상을 했다. 머리에 피가 흐르는 아버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먹으로 턱을 갈기고, 쓰러진 아버지의 배를 발로 차 완전히 숨통을 끊어 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비록 상상이긴 했지만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77쪽)
하루는 조기찌개가 먹고 싶다기에 장을 봐 와 밥상을 차렸는데 갑자기 욕을 해대며 밥상을 뒤엎는 거야. 맛이 없다고 다시 해오라고 해서. 생전 안 하던 행동을 해서 나도 놀랐고, 그동안 억눌렀던 게 폭발하면서 못 참겠는 거야. 그래서 한바탕 퍼부어댔지. 누굴 호구로 아냐고. 내가 엄마 노예인 줄 아냐고. 돌봐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다 대고 욕이냐고 어디 맘대로 해보라고. 그러곤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어. 더 이상 못하겠더라고.(206쪽)
어머니가 지난해 이맘때부터 조짐을 보였다.
금방 물어봤던 일을 처음인 듯 다시 묻곤 했다.
한번 전화를 하면 끊고 나서도 처음인 듯 몇 번이고 다시 전화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까이 사는 큰 누님의 언질은 있었지만 어머니가 내게 그런 행동을 보일 때마다 노인들은 다 그러려니 했다.
올초 어머니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얼굴을 심하게 갉아놓았던 적이 있었다.
몸놀림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여기저기 함부로 다니실 때부터 자식들은 불안했었다.
그렇게 조심하라 했는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인 줄 아는지 고집을 많이 부리셨다.
급기야 형님 집에 가시다 지난번 그 계단에서 굴러 고관절이 부러졌다.
이웃 사람의 우연한 발견이 없었다면 큰 일 날 뻔했다.
큰 누님이 맨 먼저 연락이 닿아 병원으로 모셔 수술을 하고 입원을 시켰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섬망증이 몰려와 큰 누님과 간호사들의 진을 다 빼놓았다고 한다.
초기 증세로 진단받았던 치매가 갑자기 확 진척이 된 듯했다.
어린아이처럼 집에 데려가달라고 매일 떼를 쓴다고 한다.
수술부위에 무리가 갈 수 있는데도 철부지처럼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자주 치신다고 한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다른 일로 전화를 했을 땐, 큰 누님의 목소리는 황망함과 걱정, 불안과 짜증이 마구 섞인 상태였다.
주변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자식들이 애를 많이 먹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니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황당했다.
이런저런 몇 가지 현실들이 마구 혼합되어 머리를 휘젓는다.
나뿐만 아닐 것이다.
당장은 병원을 들락거리며 관련 조치를 누가 맡아야 할지 막연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바로바로 일관성 있게 대응해야 한다.
급한 대로 큰 누님이 당분간 도맡아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맡겨둘 순 없다.
타지에 사는 맞벌이 아들 부부 대신 손주를 돌보느라 먼 거리를 오고 가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형님은 당뇨병 등 온갖 병에 시달리고 있어 자신의 건강 챙기기도 빠듯하다.
작은 누님은 생계를 위해 식당일을 다니느라 휴일도 없는 처지다.
나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당장은 어쩌나 싶다.
수술 후 열흘 정도가 지나 어느 정도 치료가 되고 진정되어 의사의 권유대로 우선 요양병원에 모셨다.
좀 더 호전되면 요양원으로 옮기는 게 순리이지 싶다.
자식들이 다들 어머니를 모실 형편이 안 되니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간병인이 돌보는 수밖에 없다.
당장의 치료비와 병원비는 이래저래 분담하겠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노인들은 한번 쓰러지면 원래대로 회복해 거동하기 쉽지 않은 게 일반적이다.
아버지가 그러셨듯 분명히 오랫동안 요양원 생활을 하리라 짐작한다.
얼마나 오래 모실지, 간병비를 얼마나 감당해야 할지 다들 걱정하는 분위기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을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이렇게 갑자기 도래하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막내인 내가 60대에 접어들었으니 자식들도 모두 젊지 않은 나이다.
자신의 몸을 건사하기도 빠듯한 형님은 노령연금 외엔 소득이 없는 듯하다.
두 누님도 얼마간 모아논 돈은 있겠지만 노후를 위해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금이지 싶다.
그나마 정년퇴직 후에 재취업한 나도 있지만 소득이 퇴직 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우리 자식들은 그동안 고생하며 조금씩 아껴둔 돈이 부모의 간병비로 다 들어갈 처지가 됐다.
뭐 하나 물려받진 못했지만 병든 부모님을 언제까지 모셔야 할지 기약이 없다.
묘한 것은 이런 걱정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끊임없이 밀려온다는 사실이다.
미국 작가 린 틸먼의 에세이, <어머니를 돌보다(mothercare)>에서도 어머니를 간병하는 자식의 이런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심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에 대한 작가 자신의 감정변화, 돌봄에 참여하는 다른 자매와의 관계, 의사와 간병인에 대한 소회 등을 밝힌다.
그녀도 어머니의 노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한 바는 있었겠지만, 모든 것이 갑자기 들이닥쳐 혼돈과 황망함 속에 불만과 짜증을 자주 토로한 적이 있었노라 솔직하게 적고 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된 시점에 쓴 글이기에 당시의 극단적인 감정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꼭 같지는 않지만 내가 맞이한 상황과 유사하여 저자가 느꼈을 감정의 변화가 쉽게 이입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혼란스러운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된 감정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추스를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한 어머니 당신이 가장 혼란스러울 당사자이다.
한편으론 애처로우면서 한편으론 당황스럽고 짜증 나는 이 현실은 우리 자식들이 넘어야 할 높은 파도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순간도 어머니를 제대로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과 짜증 섞인 불안 사이를 여전히 오가며 갈등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기도 하면서도 자식된 도리에 어긋나는 이런 생각이 왜 들까 하는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래도 문미순의 소설과 린 틸먼의 에세이를 읽고 나서 이런 감정이 내게만 생기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