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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다'

by B급 인생

중장년이라면 90년 초 MBC 뉴스데스크의 엄기영 앵커를 기억하리라.

그가 뉴스를 전할 때마다 날리던 특유의 멘트는 유명했다.

개그맨 박명수가 코맹맹이 목소리로 그 멘트를 성대모사해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는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시작으로 아시아나항공 추락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그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까지 대형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던 어이없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한 전무후무한 사고가 발생하면 잠잠해질 사이도 없이 얼마 후 엄청난 사고가 또 일어났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돼야만 합니까?"로 뉴스를 시작하곤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대국민 사과를 뻑하면 했을 정도다.


그러니 엄기영 앵커도 어처구니없다는 멘트를 그렇게 자주 할 수밖에 없었던 정말 어처구니없던 시대였다.




우리는 벌어진 일이나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고 너무 황당해서 말 조차 하기 어려울 때 '어처구니없다'라고 한다.

이 말을 입버릇처럼 흔히 쓰면서도 '어처구니'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뜻한다고 하는데,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힐 때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을 쓴다고 풀이한다.

'어이없다'의 유의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뜻이 왜 그런 황당한 상황이나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어지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두 가지 민간 속설(구글 Gemini에서 검색)이 오히려 더 와닿는다.


하나는, '어처구니'가 맷돌의 손잡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었다는 설이다.

맷돌은 아래위 두 개의 돌판도 중요하지만 손잡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곡식을 갈려고 맷돌을 가져왔는데 막상 손잡이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에,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어처구니없다'라고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궁궐 전각의 지붕 추녀마루 위에 동물이나 사람 형상의 장식물을 이른다는 설이다.

이 장식물을 전문용어로 잡상(雜像)이라고 부르는데, 순우리말로 '어처구니'라고 한다.

중요한 건물의 기와를 잇던 와공이 마무리 작업에서 이 잡상을 빠뜨리면 뭔가 엉성하고 불완전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어느 설이던 믿을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뭔가 없다거나 허점이 드러난 순간의 황당함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맥락이 같다.




내친김에 '어처구니', 잡상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다.


궁궐 전각 지붕 위에는 다양한 장식물이 설치되어 있다.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가 있고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가 있다.

추녀마루에는 인형 같기도 하고 동물 모양 같기도 한 형상의 잡상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지붕 장식물은 원래 고대 중국 건축에서 비롯되어 송나라 때부터 유행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송나라와 동시대였던 고려의 건축에 도입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궁궐의 전각 같은 격이 높은 건물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보여주며, 그가 사용하는 건축물의 장엄함과 위엄을 더하는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장치이다.

경회루 잡상 <출처> 나무위키


하지만 잡상을 비롯한 지붕 장식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원래 악귀와 재앙을 막는 주술적 벽사의 의미가 더 컸다.


옛사람들은 건축물의 모서리나 마루 끝이 귀신이 드나들기 쉬운 곳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곳에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궁궐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잡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중국 잡상이 신선과 괴수 형상이 많은데 비해, 우리나라는 신기하게도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 <서유기>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데, 이것도 그런 이유이지 싶다.

<서유기>는 바로 삼장법사가 불경을 구하러 서역으로 가는 여정에서, 제자인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수많은 요괴와 고난을 이겨내는 이야기 아닌가.

아마 잡상이 본격적으로 설치되던 조선시대에 당시 유행하던 <서유기>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추정된다.


잡상은 보통 홀수로 배치되는데 건물의 격이나 위계가 높을수록 숫자가 많아진다.

대표적으로 경복궁 근정전은 7개가 설치되었고, 경회루는 11개나 된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배치순서는 그림과 같다.


<출처> 한국건축용어사전




내가 잡상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에는 조선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궁궐문을 들어서면 각종 전각들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는데, 가끔 지붕을 올려다보며 "저게 뭐지?" 하며 궁금해하는 사람을 본다.


나는 전통건축 공부에 빠져들었던 때가 있다.

지방의 유명 사찰도 여행 삼아 종종 다녔지만, 서울에 사는 행운 때문에 전통건축의 정수인 궁궐건축을 수시로 보러 다녔다.

그 덕분에 한 때 전통건축의 각종 구성물과 부재의 명칭을 줄줄 꿰던 적도 있었다.

그때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잡상에서 유래했다고 우연히 들었다.

해서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늘 잡상이 떠오른다.


지난해 연말 연배가 부모님 뻘인 큰 처형 내외를 모시고 속초 여행을 갔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 뉴스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를 가져야 할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전했다.

맨 먼저 그 뉴스를 들었던 내가 그것을 말했더니 다들 장난인 줄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일들이 줄줄이 밝혀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일로 번지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그 일로 인해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면서 나라가 조용한 날이 없다.


만약 엄기영 앵커가 다시 뉴스데스크나온다면 이랬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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