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무량수전 하면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배흘림기둥은 떠올린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쓰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공이 크다. 무량수전 앞에 서면 누구나 배흘림기둥을 살펴보며 우리 선조의 건축적 심미안을 칭송해 마다치 않는다. 한술 더 뜨는 사람은 파르테논 신전 기둥의 엔타시스 양식을 들먹이며 오래전에 우리 문화가 이미 세계 유수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식의 자부심을 확인한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건축과 우리 고건축의 연계성을 거론하는 견강부회도 있다.
엔타시스 양식과 우리의 배흘림 방식은 엄연히 별개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 동의어로 사용되거나 같은 개념으로 파악되어 왔다. 무엇보다 학술적 근거나 자료 제시 없이 두 개념을 무분별하게 혼용하여 사용한 저명인사들의 영향도 컸다.1)
이 둘을 혼동케 한 가장 큰 공통점은 ‘착시 교정 효과’이다. 두 기법 모두 기둥을 반듯하게 했을 때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바로잡으려고 기둥 아래위의 굵기를 다르게 했다는 점이다. 또 사람의 눈으로 높은 곳의 사물을 쳐다봤을 때 윗부분이 실제보다 크게 보이는 착시를 없애기 위해 아래를 크게 만들었다고 본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아래쪽에서 쳐다볼 때 사람의 눈에 인체의 균형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아래의 오른손을 실제보다 크게 조각한 의도와 같은 이치다.
출처 : 픽사베이 하지만 엄밀히 관찰해보면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과 배흘림기둥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외형적 형태가 다르다. 우리 전통건축에는 흘림이 있는 기둥과 없는 기둥이 있다. 흘림이 있는 기둥은 다시 민흘림과 배흘림기둥으로 구분한다. 민흘림은 기둥뿌리부터 기둥머리까지 굵기가 일정하게 줄어드는 형태다. 배흘림은 기둥 허리를 불룩하게 만드는 기법이다. 배흘림기둥의 굵기를 비교하면 기둥 허리 > 기둥뿌리 > 기둥머리로 보면 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세계미술용어사전) 왼쪽 : 파르테논 신전(픽사베이), 오른쪽 : 강릉객사문 사진에서 보다시피,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은 최하단부터 최상단까지 굵기가 일정하게 감소하는 기둥이다.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지 않고 위로 갈수로 가늘어진다. 우리 건축의 개념대로라면 민흘림기둥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나라 강릉 객사문은 국내 고건축 중에서 배흘림의 정도가 가장 큰 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한눈에 보아도 가운데 허리 부분이 불룩하게 나왔다. 결국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은 배흘림기둥이 아니라 민흘림기둥으로 불러야 정확하다.
또 하나의 차이는, 그리스 건축과 우리 전통건축에 나타나는 착시현상의 교정 효과가 다르리라는 점이다. 10m 내외의 장대한 파르테논 신전 기둥에서는 효과가 클 수도 있다. 인간이 웅장한 건축에서 느끼는 넓고 깊은 시감각으로 인해 착시효과를 충분히 교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파르테논 신전 기둥은 최하단과 최상단의 굵기 차이는 3mm에 불과해 착시 교정 기능이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많다.1)
우리 전통건축의 기둥 높이는 3m 내외의 휴먼스케일 규모이다. 이런 아담한 규모의 건축에서 착시현상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착시현상이 있더라도 교정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작다. 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 눈에 보이는 배흘림기둥의 윤곽은 평행선으로 보이는 효과가 없다. 오히려 불룩한 형상만 확연히 드러난다. 과연 허리가 오목해 보이는 착시를 없애려고 이렇게 과장된 배불뚝이 기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배흘림기둥을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학자들은 구조역학적인 이유를 가장 먼저 꼽는다. 상부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에서 힘이 가장 많이 쏠리는 부분은 기둥뿌리와 허리 사이라고 한다. 기둥에 힘을 가하면 그 부분이 휘거나 부러지니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굵게 보강했다는 주장이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논리다.
그런데 이 설명도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 이유라면 왜 고대 그리스 건축가들은 배흘림기둥으로 만들지 않고 민흘림기둥으로 만들었을까? 또 아담한 규모의 우리 고건축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기둥에 역학적 고려를 하였을까 궁금하다. 허리 부분의 필요한 굵기를 충족하는 나무라면 자연 상태대로 두어도 무방 할 텐데 왜 굳이 밑동 부분을 깎아냈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품은 학자가 있다. 그의 추론은 이렇다. 2)
우리나라 현존 고건축을 관찰해보면 배흘림기둥은 주로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나타난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건축은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 대부분 공들여 다듬어서 만든 가공석이다. 가공석을 사용한 건축의 경우, 될 수 있는 한 작은 돌을 사용해야 돌을 깎는 사람은 힘이 덜 들 것이다. 게다가 돌을 깎는 것보다 나무 기둥을 깎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니, 초석에 맞추어 기둥 밑동을 깎으면 역학적 고민도 해결하면서 사람의 손도 절감된다.
후대 조선시대에는 궁궐건축 같은 고급건축물외에는 후기로 갈수록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했다. 돌을 깎을 필요가 없으니, 윗면이 평평하고 널찍하면 아무 돌이나 구해다 초석으로 사용했다. 윗면이 넓으면 굳이 밑동을 깎아야 하는 배흘림기둥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의 기둥은 배흘림기둥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이 추론을 뒷받침한다. 아직 학술적으로 이렇다 할 논의는 없지만 꽤 수긍이 가는 추론이다.
왼쪽 : 부석사 무량수전 초석과 기둥(고려 후기), 오른쪽 : 병산서원 입교당 초석과 기둥(조선중기)
아직도 누군가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배흘림기둥을 엔타시스 양식이라 소개하고 있다. 전통건축 관련 서적에서도 두 개념을 여전히 혼용하는 예를 많이 봤다. 문화란 이웃과의 교류를 통해 전파되어 변형을 거쳐 토착화하는 예가 많다. 그렇다 하여도 서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리스와 우리나라의 고건축을 비교하며 그 연계성을 운운하는 것은 견강부회다. 과거 일본에서 서구 학문을 받아들이던 시기에 자신들 문화의 우수성을 부각하기 위해 억지춘양식 연계성을 주장했던 일본 건축학자의 무모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인 이후 아직까지 학술적 논의 없이 두 개념을 무턱대고 혼용하고 있는 우리도 반성해야 할 때다.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휩쓸고 BTS가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는 시대다. 지나친 문화 국수주의도 피해야겠지만 지나친 열등의식도 버려야겠다. 우리 문화의 개성을 있는 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면 된다.
1) 이러한 문제를 꼬집는 연구로 황보경(2014.6), "엔타시스와 배흘림에 관한 건축사적 고찰", 한국 건축학술 연합 논문집 16권 3호(통권 61호), 43~51쪽이 있다.
2) 서현(2012),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 효형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