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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Apr 01. 2021

결국에는 지는 싸움이겠지만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친절한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베푼 친절을 부정 당하고 오히려 누명을 쓴다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있지 않은 일로 비난을 받고 친절을 위해 행한 일들이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오해 받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잘 벗어날 수 있을까. 예전에는 그래도 세상에는 정의가 있고 마지막에 가선 진실만이 남으니 그걸 믿고 친절과 다정을 지향하면 된다고 믿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느끼는 건, 세상은 마음만큼 진실에 관심이 없고,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진대도 그 마지막까지 가는 여정은 길고 길다는 사실이다. 한참을 걸어 오는 그 시간은 누구나 버틸 수 있을 만큼 가볍지 않다. 나눠들 수도 없는 무게를 혼자 지고 가다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지금 이 친절을 버리면, 이 무게를 내려 놓으면, 나는 손 쉽고 가볍게 갈 수 있다. 단 한번의 외면과 회피로 앞에 놓인 길이 포장도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유혹을 누구라고 쉽게 떨칠 수 있을까.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는 취준생 진명은 조건 만남을 통해 쉽게 돈을 버는 이나를 혐오한다. 그러나 그런 진명에게 아르바이트 점장이 조건남들과 같은 손길을 뻗친다. 이 손을 잡으면, 아르바이트에서 잘리지도 않을테고 고된 하루살이가 조금 가벼워질 수도 있다. 순간 잠시 흔들린 진명은 그 뒤로 이나를 전처럼 오롯한 혐오의 시선으로 볼 수 없게 된다. 내가 이나처럼 살 지 않은 것은 나의 신념과 가치관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이나에게 닥쳤던 선택의 순간이 적었던 것 뿐일 수도 있겠다고. 진명은 깨닫는다. 나의 가치관과 신념 앞에 떳떳한 것도 하나의 다정이라고 본다면, 세상은 참 다정하기 어렵다.



어린시절 왕따를 당했던 테일러는 훗날 가수가 돼서 왕따라 힘들다는 어린 팬에게 그들이 너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며 너를 부디 사랑해주란 말을 남겼다. 그 테일러처럼, 은영이는 무엇보다 사랑과 애정이 필요한 시기를 어린아이의 사악한 마음을 받아내며 지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택한다. 그건 왕따 당해도 괜찮다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은 마음 중 아직은 괜찮은 일부를 떼어 내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다정함의 신화에 가깝다. 이겨낸 사람은 원래 이겨내지 못한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곤 하니까. 이겨내지 못한 은영이 그럼에도 친절을 베푸는 쪽을 택한건 정말 기적적인 다정함이 아닌가?



악해지긴 쉬우나 다정해지긴 너무 어렵다. 그만큼 누군가의 악함을 눈치채긴 쉽지만, 다정한건 도무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은영은 매사를 다정과 친절에 근거해 젤리들과 맞서 싸우고 있지만 그게 보통 사람 눈에 보이진 않았던 게 아닐까. 그런 다정함은 어느날 찾아드는 '그래도 아직 살만하구나'란 한줄기 생각으로만 드러나니 말이다. 최선을 다해 다정을 베풀곤 홀연히 사라지는 은영. 꼭 내 도처에도 안은영이, 백혜민이, 홍인표가 숨쉬고 있었음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은영의 능력에 보상을 해 줄 만한 사람들은 대개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좋지 않은 일에만 은영을 쓰려고 했다. 아주 나쁜 종류의 청부업자가, 도무지 되고 싶지 않았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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