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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Apr 15. 2021

인간은 건반이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일>, 김지연


세상은 인스타그램보다 어둡고 에브리타임보다 밝다.



우연히 마주한 이 문장은 점점 격언이 되고 있다. 혐오와 멸시가 극에 치달은 익명 커뮤니티와 슬픔이 말끔히 지워진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가면 갈수록 불투명해진단 생각이 든다. 보여주고 싶은 것은 더 극적으로 보이고 그를 위해 보이기 싫은 것은 철저히 감춘다. 전자를 위해서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후자는 억눌린 추악을 간악하게 익명의 공간에 배출한다. 이 대비감이 빛과 그림자 같다. 아주 강하게 쬐는 빛이 있고 그 때문에 정말 칠흑의 색을 띄는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런 빛을 쬐이려면 결국 아주 강한 열이 필요하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 열을 분노와 혐오에서 빼내온다. 그런 세상이 됐다.



광원이 혐오이다보니 혐오의 대상이 되면 빛을 받을 수가 없다. 거리낌 없이 업로드 되는 럽스타그램은 이성애적 일부일처제에 걸맞는 것이어야 한다. 프로필 소개에 올릴 수 있는 건 유명한 학교 또는 기업이다. 한 눈에 알아보지 못 하는 직업과 기업과 학교는 쓸 수 없다. 이 사실에 통탄해야 하나? 나는 그저 적나라 할 뿐이라 생각한다. SNS 밖 오프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보자. 커밍아웃은 곧 낙인이 되고 이름난 학교에 가지 못 하면 죄인처럼 굴어야 한다. 회사도, 직업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빛도 그림자도 아닌 곳에서 내 정체성을 향유하며 살겠다 다짐하면, 기성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이기로 읽는다. 넌, 너만 잘났지. <응답하라 1994>의 빙그레는 음악이 하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의사를 택한다. 드라마에선 그것을 선택이라 읽는다. 빙그레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고, 그건 아들의 소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레 쓰러지고 심장수술을 받게 되자 빙그레는 '꿈 만큼이나 사람이 중요했다.'고 일축한다. 드라마에선 그게 선택이고 희생으로 비춰지지만 모든 과정에 빙그레의 자유의지는 없었다.



<사랑하는 일>의 주인공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일평생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준 할머니가 커밍아웃을 한 다음 날부터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 상황에서 주인공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커밍아웃 하지 말 걸 그랬나. 죽을 때 까지 거짓말 하며 예쁜 손녀로 남을 걸 그랬나. 기준에 맞지 않아 빛 밖으로 나가려 하면, 그를 가장 먼저 내치는 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었다. 너무도 잔혹하게도 혐오는 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발아됐다. 그래서 때로는,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런 거짓말은 진로일 수도 성향일 수도 있으며 어찌됐건 모든 걸 한데 묶어 정체성이라 부를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러니까, 오롯한 자기자신은 효에 걸맞지 않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제로의 상태는 사랑할 수 있으나 어긋난 것은 바로 잡아주는 것이 사랑이라 하겠다. 결국에는 사회적 조건이 갖춰진 사랑이고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는 마음이다. 시간이 흘러 한계가 흐려질 수는 있겠으나, 그 시간 동안 여태 쌓아온 사랑이 흐려지지 않을 법도 없다.



한 사람은 전에 서서 결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사람은 기를 거쳐 이제 막 승에 도착했다면 둘의 서사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최선은 서로를 존중하며 나란히 걷는 것인데 마음이 가면 몸이 기울고 눈이 마주친다. 그렇게 엉켜진 길은 억겁의 시간이 흘러 다시 푼데도 이미 탄성을 잃고 늘어지고 어그러진 지 오래일 테다.



광원이 멀어져야 한다. 몇 억 광년을 멀어져서 밝기의 차이가 희미해 질 때까지, 그러니까 최소 태양과 지구의 거리만큼은 멀어져야 한다. 그렇게 혐오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지면 우리는 어디서든 빛에도 그림자에도 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어디든지 간에 인스타그램 보다 어둡고 에브리타임보다 밝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말을 안 했으면 어땠을까. 진짜 나에 대해서. 내가 간절히 바라는 삶에 대해서. 할머니가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다면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하며 예쁜 손녀로 남을 수도 잇었다. 하지만 더는 내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버리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에게는 할머니 중심의 서사가, 나에게는 나 중심의 서사가 있었다.


<사랑하는 일>,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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