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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Mar 01. 2024

[2-12] 어스름한 저녁 만날 동네친구가 있다는 건

어스름한 저녁, 만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다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살면서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동네였다. 남편의 고향인 것을 제외하면 나는 이 동네와 어떤 인연도 없었다. 낯선 지역에 내려와 나의 공간을 꾸려야 했다. 카페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부터가 무계획이었지만 스스로도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일을 저지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왕이면 두눈으로 직접 보고, 두손으로 직접 만들어 가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마음을 먹고 나니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언가를 말도 안되게 시작하고 있었다.



결혼 후 몇 년 가까이 사두고 묵혀둔 땅 위에 작은 건물을 하나 짓기로 했다.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은행부터 찾았다. 머릿 속에 담긴 일을 성사하려면 먼저 대출을 받아야 했다. 함께 계약서를 쓰고 돌아온 날부터 모든 생각과 두려움을 접고 행동에 옮기자고 다짐했다. 







머릿 속으로만 그려진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 수없이  상상했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니 상상대로 흘러간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까스로 대출금 승인이 나고, 공사가 시작된 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쉴 틈 없이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지친다고 말하면 스스로에게 지는 기분이 들어 속으로만 삼키며 수일을 보냈다.







손님을 만날 날들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무모해 보이는 우리의 결정 앞에서 타인의 조언은 때로는 살갑고 따뜻했지만 한 번씩은 살을 에는 추위처럼 코끝을 날카로웠다. 사람 대신 더 깊이 책을 찾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때로는 조언을 귀담으면서, 때로는 쏟아지는 수많은 화살 속에서 우리의 허리를 꼿꼿이 지켜나가며 공간의 문을 열었다.







수개월이 지날 무렵의 여름 날, 오일장에 들렀다가 동네의 오래된 골목을 잠시 걷게 됐다. 길을 걷던 중에 작은 나무 간판 하나가 보였다.


'게으른 정원'


지난 번 왔을 때는 이 나무 간판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다. 작고 오래된,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을 만나기 힘든 그 골목에서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나무 간판 앞에서 나는 괜히 동네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조심스레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귀여운 모자와 멜빵 바지를 입은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카운터에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서가의 양쪽으로 눈을 돌렸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과 이별이 가득한 책들의 사이에 섰다. 나는 알고 있다. 서가에 가득 찬 책들은 서가를 꾸린 사람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아까 나와 눈이 마주친 이 친구에게 지금 사랑만큼 힘들고 아프고, 사랑만큼 소중한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마음으로 짐작했다.







공간을 드나들다가 그곳에서 그림책 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골목이 깜깜해지는 저녁 8시, 8명의 친구들이 모여 그림책 한 권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림책을 읽다가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책 한 권을 펼쳐두고 떡볶이를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가끔은 캔맥주를 따며 자영업의 고충을 나누기도 했다. 작고 어여쁜 그림책 속에서 새로운 삶을 그렸고, 마음 속에 간직했던 꿈을 꺼내어 보듬기도 했다.







초등학교 문방구 옆 떡볶이집에 도란도란 앉은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듯 뭉근한 시간을 보낼 친구들이 생겼다. 우리는 화분에 선인장과 떡갈나무 중 무엇을 먼저 심으면 좋을지 따위의 것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고민은 효용을 따지기도 어려울 만큼 무용했지만,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을 쉬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곳이 생긴다는 건 생각보다 내게 강한 힘을 안겨주었다. 신기하게도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으면 비어진 틈으로 명확한 무언가가 솟아 올랐다. 타인과의 시간을 통해 나는 어쩌면 스스로 자라나는 힘을 길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게 어스름한 저녁,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 엄마와 아내로서가 아니라 나를 나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근사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알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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