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파과, 구병모(위즈덤하우스)
사념들이 어지러이 공기 중으로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책장을 덮는다.
오랫동안 서가 사이에서 묵혀진 책 냄새가 계속해서 코끝을 간질인다. 사람들의 손때가 가득 묻은 책이 지금 내 눈앞에 존재감을 발산한다. 다 해지고 너덜거리는 책 한 권이 '파과'라는 이름과 제법 잘 어울린다. 언젠가 이 책도 인쇄소에서 갓 나와 따끈따끈하고 날카로운 멋을 가지고 있었을 테지, 과거의 파편들을 짐작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책 <파과>의 주된 내용은 그리 대중적인 소재는 아니다. <파과>는 사람 죽이는 일을 업(業)으로 하여 살아온 한 여자의 삶을 담고 있다. 조금 특별한 점은 주인공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의 두 곱절보다도 더 많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은연중 알게 모르게 편견을 갖고 살았던 것인가 잠시 반성모드에 빠진다.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나의 꼰대 같은 도덕적 가치관에 어긋난다. 붉은 피 한 방울만 보여도 질색팔색하는 유약하고 엄살 가득한 성정이기도 한지라 '살인'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작품을 꺼리고 잘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왜 이리 담담하고 무덤덤하니 심지어 잔잔하게 읽힐까.
잔인함, 잔혹성, 열정 등을 상징하는 피는 강렬하고 진한 빨간색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진하고 짙은 붉은빛보다는 조금은 덤덤하고 농익은 자줏빛이다.
<파과>는 일상을 살며 쉬쉬하고 모른 척하며 으레 넘겨버리던 우리의 삶 속 응지를 비춘다. 죽음, 노화, 세월의 흐름, 닳고 해지고 스러지고 사라지고 부서지는 것들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 담긴 본질을 바라본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허무함, 씁쓸함, 무상함, 당연함 등이 마음 끝 커다란 창에 방울방울 맺힌다. 짙은 안개가 낀 듯 멍하고 뿌옇다. 몇 번을 바라보고 바라보다가 다짐하듯 침을 꿀떡 삼키곤 마음의 창을 가득 메운 방울방울들을 맨손으로 스윽 닦는다. 창 너머로 결국 삶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이, 삶을 담담하게 마주하는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
무수한 곡절과 휘어짐을 가진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본다. 물음은 그녀에게 사치였다. 삶은 어쩌다 보니 '지금'이다. 수동의 형태든 능동의 형태든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흐르는 세월 앞에 '파과'는 '파과'가 된다. 살아온 시간들만큼 주어지는 상실을 산다.
결국 삶은 허무하고 무용하다. 그녀는 무용마저 담담히 안고 산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그녀 자신에게 주어진 몫들을 하나하나 행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들이, 행동들이 한없이 인간적이다. 시간이 이리저리 긋고 간 상처들이 이제는 흉터로 남아 삶의 구덩이 곳곳을 메운다.
부족함 많은 독자이지만은 책 끝에 남은 작가의 질문에 답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파과'
한 단어에 담긴 수많은 의미가 제각기 울림을 만들어낸다. 공명하고 부서지며 제 길들로 흘러가는 단어들의 파동을 느낀다.
그렇게 이 책은 <파과>가 된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midjourney
인용 출처 :『파과』구병모, 위즈덤하우스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