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아오르는 그 무언가
근래 5년간 이렇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낸 해는 처음이었다. 우선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 때문에 수업은 일상의 피로를 더 얹지 않을 정도로 너무 적지도, 의욕이 넘쳐 너무 많지 않도록 늘 적당히 들어왔다. 중간에 너무 과하다 싶으면 자체 드롭시키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 여름학기에는 회사 가지 않는 요일에 듣고 싶은 과목이 있다면 그냥 다 들었다. 견학은 정신없고 피곤해서 선택지에 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트바젤을 보러 참여도 하고. 매년 여름, 학교에서 하는 큰 전시에서 회화_ 벽화_ 에칭 이렇게 3군데 전시했다. 그리고 수영을 정말 열심히 다녔다. 생리날을 제외하고 최소 주 4회에서 거의 매일 갔다. 학교 수업도 열심히 참여하고 일도 하며, 작업실에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그럼에도 하루의 에너지가 식지 않았는지 저녁에는 수영으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잠에 들었다.
수영장을 지나는 길목에 거대한 분수가 있다.
수직으로 뿜어내는 강렬한 물줄기를 멀리서부터 바라보며 걷는다. 가까워질수록 어떠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걷다 말고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걷기도 했다. 이번 여름에 그 이미지에 대한 잔상이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왜 끊임없이 이 장면을 생각하는 걸까.
한 계절에 내내 머물러있던 이미지를 그려내기로 했다.
응집된 검고 강한 선들이 수직으로 빠르게 솟아올라갔다 이내 떨어져 내린다.
빠르고 강한 움직임에 두꺼운 파스텔은 이따금씩 부러지기도 하고 작은 파편들이 바닥에 쌓였다.
작업할 때마다 사이즈가 커서 땀이 뻘뻘 났고 생각보다 오래, 전시하기 직전까지 그렸다.
손은 자주 검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상은 마치 투영체인 듯 의미 없던 물성이 내 마음과 맞물리며 거대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세계를 보게 한다. 잔상의 이미지가 소진될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이 끝날 무렵 대답을 찾게 된다.
최근 몇 년간의 나는 삶의 지속성에 중점을 두고 균형에 대단히 집착해 왔다. 일과 학업, 그리고 나의 작업 속에서 지치지 않을 만큼 힘을 분배하고 모두 다 해가 되지 않게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울타리가 나를 규정짓는 한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되감기는 장면, 중력을 거슬러 본성에 대항하는 듯_ 맞서기 위해 뭉쳐있다가 거침없이 발산하는, 위로 힘차게 향하는 물줄기를 매일 바라보며 아마 내 안에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마주한 것 같다. 적당히의 삶이 지겨워진 듯 그동안의 눌러놓았던 마음을 분출하고 싶은 욕망을.
영원할 것 같았던 불볕더위는 희미해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가을의 초입, 그동안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꾹꾹 눌러놓았던 작업에 대한 갈구와 욕망이 터져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울이 기운다.
쏟아내는 삶을 살고 싶다.
2023년 여름의 작업들.
내 키에 자그마치 두 배도 더 큰 벽. 원래는 미니미한 분수였는데 강사님이 더 크게 그리면 멋있을 것 같다고 고소공포증 있다고 했는데도 이겨낼 수 있다며 사다리를 빌려주셨다. 땀 뻘뻘 흘리면서 아찔하게 그렸다. 전시가 끝나고 규정상 다시 덮어야 한다고 했지만 다음 학기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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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동안 열심히 했던 에칭 작업.
월요일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두 세시까지 작업했다. 다양한 기법이 있지만 나는 동판에 니들로 바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아래 그림처럼 선이 굵고 강렬하다. 하지만 손은 굉장히 저리고 쥐고 필 때 하루종일 아리다.
바드 나우하임에 있는 분수대.
에칭은 물감을 펴 바르고 찍어낼 때마다 결과를 유연히 조절할 수 있다. 물감을 균일하게 바르고 동판에 새긴 부분만 물감이 잘 들어갈 수 있도록 판을 깨끗하게 닦는다. 찍어서 깨끗한 선이 명확하게 나온 것을 대개는 잘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물감이 군데군데 뭉치거나 번지는 듯한 느낌도 좋아한다. 감정들이 몽글몽글 스며든 느낌이랄까. 판화작업은 어느 정도의 개연성과 우연이 만나 늘 약간의 설레임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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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그림도 두 개 그려서 같이 전시했다.
한 이미지에 집중하다 보면 마인드맵처럼 번져나가 가는데 이 그림이 그러하다. 분수 물줄기의 가장 윗부분, 둥글고 부드럽지만 그럼에도 힘이 고여있는 그 부분을 추상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거대한 검은색 선 드로잉을 걸린 오른쪽 벽 옆면에 부착했다.
워낙 색을 많이 쓰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많이 덜어냈다. 그리고 좋아하는 파랑을 원 없이 쓴 듯하다. 이런 추상 이미지 작업을 더 하고 싶다. 아마 다음 학기에 이어서 계속 작업하지 않을까 싶다.
강렬하고도 뜨거웠던 2023년의 여름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