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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목 Aug 20. 2023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이우정 감독의 <최선의 삶>

영화를 보며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학창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고, 점차 어그러지는 셋의 관계를 보며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를 비롯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관계를 조명한 다른 영화들도 떠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듯, '최선'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대며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들의 선택은 최선이었나. 과연 최선이란 무엇일까.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응어리가 진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서 일단 최선이라는 단어의 명확한 뜻을 검색해 봤다. 최선은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좋고 훌륭함, 혹은 그런 일'과 '온 정성과 힘'이 그것이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은 다르다.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선택도, 자신의 선택을 이루기 위한 정성과 힘의 크기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 강이, 소영, 아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가출을 결심했다. 강이는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소영이는 연기를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에 대한 부모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 아람은 가정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지만 그 선택은 셋을 혹독한 현실 앞에 마주하게 했다. 사회엔 또 다른 종류의 폭력들이 있다는 걸, 온전한 집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웠던 셋의 관계는 집에 돌아온 이후 어그러진다.


푸른 밤의 비밀을 들키는 게 두려웠기 때문일까. 소영은 학교에서 강이를 외면하고,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 강이는 어그러지는 셋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누구보다 가까웠던 예전의 셋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그리고 강이는 끝내 식칼로 소영이를 찌르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야 만다.


학교, 집, 학원의 반복이 일상의 대부분인 시절이었다. 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경험하며,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지극히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밉보일까 센 척도 했다. 작은 실수에 쩔쩔맸고, 잘못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 큰 잘못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센 척을 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누구나 실수하며, 작은 실수로 내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오히려 작은 잘못을 덮기 위해 용을 쓰다 더 좋지 못한 결말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일들이 있다. 그때는 최선의 선택인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가 되는. 그때도 최선의 선택을 했고, 지금도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이 최선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사소한 실수가 최악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지도 않는다.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렇기에, 좀 더 겸허해지고 현명해질 수 있는 것 같다. 불운한 날이 있으면, 운수 좋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그러지는 관계도, 돈독해지는 관계도 모두 있을 수 있다.


영화 속에 담긴 갑천 길을 보면서 괜스레 반가웠는데, 강이의 집이 있던 읍내동에도 한 번 가보려고 한다. 직접 계단을 오르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기차 소리를 들으면, 그 삶을 지겨워했던 강이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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