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잘못 잡으면 자존감을 해치는 칼날이다.
고사성어 ‘백중지간(伯仲之間)’은 본래 형제 간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뜻으로, 비교 자체의 부당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상대적으로 수학을 잘해서 똑똑해 보이는 큰아들과 달리, 수학을 힘들어하는 둘째에게 나는 한결같이 ‘좋아하는 게 다르고, 잘하는 게 다르다’며 격려한다. 속이 천불이 날 때쯤이면, 자연스레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네가 경훈이 동생이가?”
성장기 때 나의 ‘비교’ 경험은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초등학교 때는 6년 내내 반장을 맡았다. 결코 성적이 우수하거나 타의 모범이 되는 ‘교과서 속 반장’은 아니었지만, 사교성이 좋았고 친구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6학년 때 반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표에 ‘미’가 있었고, 사교성이 좋았다는 증거는 전교 홍보부장을 맡았던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배움의 즐거움은 중학교 입학과 함께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3살 터울인 형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다.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처럼 무뚝뚝하고 오직 공부만 하던 모습으로 기억된다. 가끔 친구들과 농구한다고 귀가가 늦은 것 외에는, 성문종합영어를 왼손에 끼고 수학의 정석을 오른손에 들고 다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욕설 한 번 하지 않던 FM이었다. 그가 중학교를 휩쓸고 졸업한 바로 그 학교에 내가 입학했고, 하필이면 형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이 나의 담임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비교 체험’은 새 학기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니가 깽후니 동생이가?”
라는 질문 뒤에는 어김없이
“너거 햄은 공부 잘하는데, 니는 와 글노?”
지금처럼 ‘중2병’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비교 현장 체험’을 통해 점차 엇나갔고, 공부가 아닌 유행을 좇으며 지금도 함께 지내는 동네 친구들과 그 나이에 어울리는 일탈을 조금씩 시작했다. 동네 독서실을 핑계로 귀가 시간을 점점 늦추기 시작했고, 성적은 중학교 3년 동안 서서히 연착륙했다.
그리고, 나는 ‘인문계’가 아닌 ‘공고’에 진학할 뜻을 당당히 밝혔다. 어차피 공부도 못하고, 취미도 없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공고나 상고에 진학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록 가방끈이 길지 않으셨던 부모님은 호락호락하지 않으셨다. 그 시절 여느 부모들처럼, 당신이 배우지 못한 한을 무기로 자식을 설득하셨다. 결국 3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학부모 면담 끝에 인문계 진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사실 인문계를 가기 싫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비교’가 고등학교에서도 이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중학교는 주거지 중심으로 배정되어 자연스럽게 한 학교에만 다녔는데, 이 중학교 출신들은 인문계 고등학교 중 A고에 70%, B고에 20%, C고와 D고에 각각 5% 정도 배정되었다. 소위 ‘뺑뺑이’라 불리는 제도였기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공부 잘하는 형은 70%나 진학하던 A고에 다녔고, 그곳에서도 재미없게 모범생 노릇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A고에 가기 싫어서라도 공고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는 기적처럼 5%였던 D고에 배정되었고, 형의 소문이나 흔적이 없는 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친한 친구는 없었다.
‘비교’ 없는 곳에서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을까?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면 나는 성장기 때 ‘비교’라는 단어에 반항심이 있었겠지만, 사실 원래부터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고3 때 야간 취업반에 들어가려다가 집에서 호되게 혼나기도 했고, 그림을 좋아해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가 형편상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수학을 좋아해서 4년제 ‘수학과’ 진학을 희망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고, 결국 취업이 잘된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3년제 ‘방사선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나를 형과 비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만나는 여러 과목 선생님들의 단골 레퍼토리였을 뿐이다. 부모님은 큰아들이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도 늘 잘해줘서, 오히려 작은아들에게 학원을 보내주지 못하는 형편에 미안하셨는지도 모른다.
자녀가 영어는 잘하지만
수학은 못할 수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자녀의 미래가 보인다.
형제의 머리를 비교하면 양쪽을 다 죽이지만,
형제의 개성을 비교하면 양쪽을 다 살릴 수 있다.
_고재학 《부모라면 유대인처럼》(예담)
결국 나는 ‘비교’라는 틀 안에서 나를 잃어가며 성장했지만, 그 경험은 지금 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준다. 누구나 잘하는 것이 다르고, 각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형과의 차이는 열등감이 아니라 다양성의 증거였다. 내 아이에게는 ‘비교’보다는 ‘이해’와 ‘응원’을 전하고 싶다.
저녁 식사 후, 식탁에 앉아 여전히 ‘책 읽는 척’하는 나에게 작은아들이 수학 문제집을 들고 온다.
“아버지, 3문제만 도와주세요.”
“당연하지~ 갖고 와봐~”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관세음보살”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