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이 동하다 Apr 12. 2023

초딩 빨간 띠 따던 날, 엄마의 자기주도 놀이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바꾸는 행위


    바깥에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빨라지는 발자국 소리에서 녀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현관문 도어락 덮개가 위로 올라가고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8자리가 이어진다. ‘띠리릭~’ 알림과 함께 문이 열린다.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신발을 벗자마자 중문을 열고 들어선다. 겨울의 끝자락에 입은 얇은 패딩을 서둘러 벗었고 양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으며 멋지게 포즈를 취한다. 허리춤에는 빨간색 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날은 아이가 태권도 승급심사에서 합격해 파란 띠에서 빨간 띠로 바꿔 단 날이다. 아이는 이 기쁨을 빨리 엄마에게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눈으로 주위를 스케치한다.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서.



    눈은 손보다 빠르다. 화장실문에 부착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바로 그곳으로 향한다. 흰색 도화자지가 덮여있다. 아들이 그 도화지를 벗겨내자 9개의 포스트잇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빨간 띠로 승급한 아이를 위한 엄마의 서프라이즈 선물이다. 아홉 개의 메모지에는 각기 다른 미션이 써져 있다. 칭찬스티커 2개, 문방구 2천원 이용권, 편의점 2천원 사용권, 피자(김○○이 쏜다), 통닭(김○○이 쏜다), 칼국수+김밥+만두, 과자파티, 고속도로 1회 이용권(경남만), 영화+팝콘 이 적혀져있다. 그리 무겁지 않으면서도 아이가 좋아하는 거랑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적혀져 있다. 아이는 9개의 포스트잇을 빠르게 스케치하더니 세상 기쁜 표정으로 엄마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척 하더니 이내 고속도로 1회 이용권(경남만)을 선택한다. 엄마에게 팔을 쭉 뻗으며 제시하며 3초간 포즈를 취한 뒤 살짝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근데 경남이 어디까지야?”


    엄마는 아이가 이 종이를 뽑으리라 예상했었다. 우리가족은 주말마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으로 당일치기 나들이를 가고 있었고, 아이의 관심사는 부산지하철 노선과 함께 고속도로 지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라 경남, 경북, 전남, 전북에 대한 개념이 아직 잘 자리 잡지는 않았다. 엄마의 설명이 이어지자 아이는 순간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그럼 다시 하겠다며 방금 뽑은 메모지를 문에 붙인다. 다시 9개가 된 포스트잇 중에서 고민하더니 이내 하나를 낚아채며 엄마에게 보여준다. ‘피자 1판(김○○이 쏜다)’ 김○○에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있다. 녀석은 그것까지 보지는 못했는지, 아님 피자라는 단어만 눈에 들어왔는지 해맑은 표정이다. 엄마가 신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피자 1판, 김○○이 쏜다!”

 “잉? 왜 내가 쏘는 건데?”

“네가 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주는 거야~”


    엄마는 문 앞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지막대화까지 폰으로 녹화하여 아빠에게 보냈고, 아빠는 이 영상을 편집해서 자막과 함께 SNS에 남겨서 이날을 추억했다. 초등1학년이라 돈에 대한 경제적 체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터이다. 용돈을 받으면 무조건 저금통에 넣어 두는 게 다였다. 아직 저학년이라 친구들과 분식점이나 편의점 여행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돈이라는 건 어른들이 쓰는 것이고 아이들은 받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아이에게 엄마는 즐거운 이벤트를 제공했다.


    이 작은 놀이에서는 아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아이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줬으며, 가족을 위해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마저 제공하였다. 가족이 함께 축하하고, 아이가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3종 세트를 갖춘 이벤트였다. 물론 이날 저녁 유치원에 갔다 온 동생과 함께 우리 네 가족은 맛있는 피자를 먹었고, 아이에게 ‘덕분에’라는 말과 함께 잘 먹었다는 표현을 잊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했다.



    로제 카이와 저서 「놀이와 인간」이라는 책에는 네 종류의 놀이에 대해 설명한다. 먼저 바둑, 장기와 같이 경쟁하는 놀이를 통해서 인간 스스로 우월성을 나타내고 싶어 하고, 윷놀이나 주사위놀이를 통해 운명을 시험하고, 소꿉장난, 연극놀이를 통해 역할을 대행하며, 그네타기와 회전목마처럼 아찔함을 경험한다. 이날 9개의 포스트잇중 하나를 선택하는 작은 놀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아이의 사고는 이 작은 놀이를 통해 익숙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했으리라 생각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의자도 쉬고 싶을지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