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5)
캄캄해서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발걸음은 주춤하게 된다. 무엇을 밟을지, 어디에 걸려 넘어질지, 무엇과 부딪치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도 계속 가야 한다면 소리를 지르며 가야 할까. 조용히 숨죽이며 가야 할까. 아니면 천천히 더듬거리며 가야 하는 걸까.
발걸음이 발자국을 남기듯,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흔적을 남긴다. 좋은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게 받아들인다. 지나간 거라며 쉽게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이건 새로운 공부이고, 새로운 공부방법이다. 어려움과 위기를 대처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잘못과 실수에서도 배우는 게 있다고 여긴다면 값진 배움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기에 그렇다.
비록 나의 이야기의 어느 점들에서는 좋은 결과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런 표현이 나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배움은 다양한 곳에서 이뤄진다. 태어난 아기의 모든 경험이 배움이듯이 나의 모든 경험은 공부이다. 공부는 책상을 넘어서서 발길이 닫는 모든 곳에서 행해진다. 인생이 곧 공부인 것이다. 실패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공부로 전환이 가능하다. 실패가 공부가 되면 다음 이야기를 바라보는 눈이 두려움과 좌절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 있다. 그 희망들이 겹겹이 쌓여 누구라도 읽을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게 아닐까.
나의 삶이 후대에 읽혀지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 내가 겪는 순간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 속에서, 난 수많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중이다. 환한 길을 해맑게 걷기도 하고, 캄캄한 길을 더듬거릴 때도 있다. 모두가 박수치는 서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아쉬워하거나 고개를 젓는 이야기가 써 지기도 한다.
지금 부끄러운 건 괜찮다. 실수와 잘못도 공부로 받아들여 희망의 글감을 재창조하게 하는 거라면 그건 괜찮게 흘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괜찮아 보이려고 진리를 타협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멀리한다면 후대가 읽다가 부끄러워 덮어버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비록 지금 부족해도 후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삶을 순간순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도 다음편에는 희망의 이야기를 꿈꿔야 한다. 실패도 공부가 되게 하면 좋은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여기지 않거나 실패를 용납하지 못해서 또는 용납하고 싶지 않아서 진리를 왜곡한다면 나의 걸음은 반면교사용 글감이 점점 많아지지 않을까.
인생은 흔적을 남긴다. 나의 흔적이 좋은 것만 있게 하려는 건 욕심이다. 욕심을 버리면서 부족하고 실패한 흔적도 의미있게 만드는 건 인생을 배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흔적이 값진 글감으로 남겨지게 된다. 실패도 공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의 부끄러움이 후대에 유산같은 이야기가 되려면 진리를 찾고, 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글만큼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