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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비 Sep 06. 2024

아이들은 만화주인공처럼 말한다.

특별함을 수집하는 그들만의 시간

2010년 이후로 처음 초등학교에 다시 발을 들였다. 약 4개월동안 기간제 보조강사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수인계를 끝내고 담당 사무가 정해지기 전, 교무실 책상 위에 놓인 과자 몇 개와 챙겨주신 냉장고 속 과일 주스를 먹는 여유를 누렸다. 어른이로 누리는 책임 없는 쾌락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먹기만 했더니 좀이 쑤셔서 수업 시작 종이 울린 뒤 복도로 나섰다. (사실 교무실에 있는 모두가 나한테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돌로 지어져서 그런가 서늘한 건물 안으로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느끼며 단정히 쭉 뻗은 복도를 걸었다. 조금 걷다가 은근한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멈춰 섰다.


음. 좋구나.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네모 반듯한 운동장은 어른인 나에게는 작지만 아이들에겐 한없이 드넓어 보였다. 두 개의 반이 동시에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다. 공만 도르르 굴러가도  함성과 웃음이 끊이질 않고,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넘실넘실 차올라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운동장 넓은 거 맞네.


낮의 운동장, 해가 쨍쨍을 넘어 짱짱하다. 그런데도 그늘에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썬크림은 발랐나...'하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은 태어나길 태양의 아이들로 태어난 것 마냥 운동장 한 편에서 저 편으로 달려간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태양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처럼 순전하다.


“여기로 던져!”

“내가 잡는다!”

“나이스, 좋아!”

“겨우 이거야?”


어라, 이거 왕년에 많이 들어본 말툰데. 유치원생-초등학생 시절에 봤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이곳 저곳에서 출몰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첫번째로 알게 된 사실. 아이들은 만화 주인공처럼 말한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하긴, 태양의 자손이라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뉴스에서 본 빛을 잃었던 아이들을 떠올린다. 누가 그 빛을 집어삼켜 버렸을까. 이곳에 있는 동안 내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일은 수많은 고유한 빛들을 단 하나도 꺼트리지 않는 이라는 무언의 계시를 받았다. 성화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그것을 내내 지켜봤을 올림픽 관리원처럼 나도 아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된다. 갑자기... 저 운동장이 올림픽 경기장처럼 보인다.


창가를 떠나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간다. 수업이 한창인 시간의 복도는 조용하다. 먼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구구단 외는 소리가 들리고, 창 밖에서는 운동장을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이 잔잔하게 물결쳐 온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귀밑머리를 스치는 후터운 바람을 느껴본다. 한가롭다. 특별하다. 좋다. 조퇴하던 그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느꼈던 기분이라면 아실지.


매번 수업종이 울리고 나서야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던 초등학교 짝꿍이 떠오른다.


‘너는 쉬는 시간에 뭐하다가 이제야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던 그 애가 참 이상했었는데. 그 애는 그때부터 텅 빈 복도의 특별함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혼나는 건 잠깐이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던 그 친구의 무덤덤한 표정을 이제서야 이해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특별한 기억은 영원하니까, 앞으로는 아이들이 특별함을 수집하는 시간을 한 두번쯤은 모른 척 해야겠다고.


+ 그리고 나는 정확히 3일 뒤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던 준서의 요청을 기각한다. 준서의 표정은... 장난끼가 가득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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