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은비 Jul 08. 2024

하나] 아이들은 만화주인공처럼 말한다.

2010년 이후로 처음 가 본 초등학교. 약 4개월 기간제 보조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뻣뻣하고 어색했지만 동기(?)선생님이 계셔서 위안이 됐다. 인수인계를 끝내고 담당 사무가 정해지기 전, 교무실 책상 위에 놓인 과자 몇 개와 함께 주신 과일 주스를 야무지게 먹으면서 여유를 누렸다. 실로 책임 없는 쾌락이었다.


내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더니 (사실 교무실에 있는 모두가 나한테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좀이 쑤셔서 수업 시작 종이 울린 뒤 복도로 나섰다. 돌로 지어져서 그런가 서늘한 건물 안으로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느끼며 단정히 쭉 뻗은 복도를 걷다가 은근한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멈춰 섰다. 음. 좋구나.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인다. 낮 시간이라 해가 쨍쨍을 넘어 짱짱하다. 그런데도 그늘에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태어나길 태양의 아이들로 태어난 것 마냥 운동장 한 편에서 저 편으로 달려간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태양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처럼 순전하다.


“여기로 던져!” 

“내가 잡는다!” 

“나이스, 좋아!” 

“겨우 이거야?”


어라, 이거 만화에서 많이 들어본 말툰데. 


초등학교에서 첫번째로 알게 된 사실. 아이들은 만화주인공처럼 말한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하긴, 태양의 자손이라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게 당연하겠다. 어렸을 적 읽은 수많은 탄생설화와 건국설화도 아이들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동시에 뉴스에서 본 빛을 잃었던 아이들을 떠올린다. 누가 그 빛을 집어삼켜 버렸을까. 그늘을 가진 아이는 전적으로 나와 같은 어른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이 가설에서 확신으로 바뀐다. 운동장을 종횡무진하며 해맑게 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증인이 되기로 태양 밑에서 엄숙히 선서한다. 그늘을 가진 아이를 보게 된다면 그를 탓하지 않고 모든 빛과 애정과 사랑만을 듬뿍 주겠다고.



수업이 한창인 시간의 복도는 조용하다. 먼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구구단 외는 소리가 들리고, 창 밖에서는 운동장을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이 잔잔하게 물결쳐 오는데 복도 홀로 고요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귀밑머리를 스치는 후터운 바람을 느끼고 있는 나. 멋지다. 특별하다. 좋다. 조퇴하던 날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느꼈던 기분이라면 아실지.


매번 수업종이 울리고 나서야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손을 들었던 초등학교 짝꿍이 생각난다. 


‘너는 쉬는 시간에 뭐하다가 이제야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니?!’ 


선생님의 심기를 거스르면서도 꼬박꼬박 손 들던 그 애가 참 이상했었는데. 그 애는 그때부터 텅 빈 복도의 특별함을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혼나는 건 잠깐이야'라던 그 친구의 애늙은이 같던 말을 이제서야 이해한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특별한 기억은 영원하니까, 앞으로는 아이들이 특별함을 수집하는 시간을 한 두번쯤은 모른 척 해야겠다고.

작가의 이전글 우당탕탕 초등학교 표류기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