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작년 결혼 후 임신, 출산을 계획하며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밥벌이보다 존재 차원에서 의미 있고 잘할 수 있는 일로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싶었다. '돈을 못 벌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선택했던 직업은 잠시 생계는 해결해 줬지만 내적인 공허함과 나의 잠재력을 다 끌어내 주진 못했다. 일은 우리 시간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 과거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해 유한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나는 쉼을 택했다.
퇴사 6개월 차 아직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퇴사 후 처음으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밥보다 존재를 먼저 생각하는 의식적인 노력, 즉 현실적인 문제는 잠시 덮어두고, 타인에 대한 모든 신경을 끄고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가만히 들여보는 용기를 내 본 덕분이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호주 여행 막바지에 참가한 AKYPA(Australia Korea Young Professional Association) 리더십 포럼에서 만난 한 커리어 멘토님 덕분이었다. AKYPA는 '한호 차세대 전문가 협회'의 약자로 호주와 한국 양국 관계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 있는 청년들의 네트워크인데,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는 법을 배우고 싶어 포럼에 참가했다.
이날 만난 멘토님은 커리어 설계 전 명확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커리어를 설계하기 전,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명확한 인생부터 그려보세요."
호주에서 만난 단단하고 멋진 멘토님
호주가 본사인 글로벌 IT기업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마케팅을 책임지고 있는 젊은 여성 리더. 한국에서 영업, 기획,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후 호주로 이직한 멘토님의 경력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따뜻하면서도 자신감 넘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 명확한 자기 인식은 참 닮고 싶은 부분이었다.
멘토님은 자신의 강약점은 물론, 본인이 가장 효과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에 대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의 강약점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업무 특성이나 환경을 사분면으로 나타낸 표는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본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내공이 느껴졌다. 이렇게 명확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결단력 있게 내렸던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목표로 한 기회를 따내고, 회사와의 협상에서도 지지 않고 상대를 설득해 낸 것이다.
멘토님이 후배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1. 커리어를 설계하기 전 먼저 인생을 설계하세요. 그래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우리 개개인은 고유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에요. 나의 고유함을 믿고, 나만의 차별화된 이야기를 만드세요.
3. 나의 잠재력을 믿고, 꿈을 크게 꾸세요.
세 가지 모두 명확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나의 고유함이 유일무이하다는 것과 내 가능성을 믿는 것.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에 있어서 불만족하거나 불안했던 이유는 깊은 내면 속 내 목소리를 외면한 채 현실과 타협한 선택들을 내렸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주어진 선택지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렸다 생각했지만, 선택지를 고를 때조차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는 맞지 않는 잘못된 선택지들을 잘 못 택한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빠르게 변화는 사회에서 불안이 엄습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자기 인식이 분명한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변의 수많은 잡음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유연하되 흔들림이 없다. 삶의 방향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흔들림이 없고, 늘 변하는 삶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기회 중 직감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아내고, 그에 맞게 카멜레온처럼 다양하게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하다. 따라서 불확실성의 파도에 휩쓸리기보다그 위에서 파도를 타며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얼마 전 '위대한 멈춤'이라는 책을 읽었다.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세프 캠벨,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 베스트셀러인 그리스 로마신화 시리즈 작가 이윤기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생의 전환기를 거치며 평범했던 사람들이 비범해진 이야기를 전한다. 전환은 마음속 깊은 곳의 내 목소리를 듣게 되는 어떠한 사건을 겪은 이후, 그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각자의 삶에서 주어진 소명을 좇은 덕분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데 '수동적 능동'이 진정한 능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 삶은 내가 만들어 간다 생각한 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느꼈다.책 서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러 인물들을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근본적인 변화는 삶의 목소리, 곧 자기 운명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수용>에서 출발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삶을 조종하려는 마음을 멈추고 삶이 앞장서도록 비켜주는 것, 삶이 말하고 내가 듣는 것, 삶이 요구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이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면, 그대 믿을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살아 있다 느낀 시간은, 내 마음을 강하게 이끌리는 것들에 도전하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자기 인식이라는 표현은 몰랐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롯이 그 순간 내가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내 마음 심층부에 해당하는 무의식이 이끄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반면, 명확한 표지판을 잃고 불만족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면서부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50년 동안 무의식과 상징을 연구해 온 심리학자 칼 융은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생 동안 수많은 무의식의 신호를 받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신호에 관심이 없다"
융에 따르면, 꿈이나 상징은 우리 무의식의 발현이고 꿈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운명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지, 우리 안의 더 큰 잠재력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진정한 능동의 삶은 내 운명과 내면을 잘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퇴사 6개월 차, 전환기에는 밥보다 존재를 먼저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이기에 이렇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이리라. 책을 읽으며 생각보다 내가 아직도 타인의 욕망을 탐내고 남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너지를 내 안으로 집중해 본다.
무의식 기저의 참된 나를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를 내면 소명이 분명해지고, 소명이 분명해지면 나에게 필요한 기회와 인연은 다가오리라 믿는다. 마음속 깊은 곳의 의식이 물질세계의 현상으로 발현되는 '동시성'을 믿고 기다린다. 이 마음가짐만이 이번 전환기를 진정한 삶의 전환으로 바꾸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