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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ob Feb 29. 2024

나무의 속도만큼만 자라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꽤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부담을 느낄 정도로 멋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많아졌습니다. 남들이 감탄할 만한 멋진 글을 적고 싶은 마음이 생겼죠. 이는 아마 제 주변의 영향이 적지 않은 듯싶습니다. 제 주변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와 함께 책을 몇 권이나 출간한 친구도 있고, 혼자 힘으로 직접 책을 만들어 낸 친구도 있고, 유명 웹소설 사이트에서 활동 중인 작가님도 이번에 이 먼 땅 캐나다에서 새롭게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모두 제 또래라는 사실이 저 또한 그들처럼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 딴에 과한 욕심을 낳게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친구를 대하다 그 사람이 그가 쓴 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과 깊게 알게 된 바, 휘황찬란한 멋진 글에 비해 그 사람의 품(品)이 살짝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그의 글이 너무 멋져서 그 사람이 허술해 보였달까요. 물론 제가 감히 뭐가 된다고 그 말을 붙이진 않았지만,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저 또한 같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혹시나 저를 아는 사람이 제 글과 제 말을 듣고 허영(虛榮)을 느끼진 않을까 싶은 위기감을 말입니다. 그리 생각하니 제 글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아니, 지금 제 글도 분명 제 이상의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 앞에서 저 스스로에게조차 허영을 느끼며, 역시 ‘멋진 글’ 혹은 ‘좋은 글’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여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면, 좋은 글은 자연스레 나오지 않겠습니까? 좋은 나무에 자연스레 좋은 열매가 맺히듯이 말입니다.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작년 연말부터 이번 연초까지 먼 한국으로부터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멀리서도 저를 기억해 준 것에 참 감사한 연락들이었지만, 그들이 건네온 조언과 충고는 저를 꽤나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 이제는 목회(牧會)의 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라는 우려 섞인 조언과 충고였죠. 사실 목회를 그리 생각하지 않고 신학대학교에 들어간 저에게 목회에 대한 질문은 익숙했습니다. 신학교에 재학하면서도 소방관과 간호사를 꿈꾼 저는 전도사 사역을 하면서도 항상 목회에 대한 질문을 받으며 지내왔죠. 발목 수술을 크게 두 번이나 하면서 어렵게 소방관의 꿈을, 바늘 공포증으로 인해 쉽게 간호사의 꿈을 접었지만, 목회의 길은 여전히 제게 미지수였습니다. 저에게 최선은 제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진 몰라도 ‘생명’과 ‘사랑’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죠. 그렇게 먼저 ‘좋은 사람’이 되면, 훗날 무엇을 하게 되어도 ‘좋은 무엇’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 분야에서 ‘유능한 무엇’이 되진 못하여도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미지수 속에서도 저 나름의 바른 지향을 가지고 나름 이렇게 저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제게 온 전화들은 너무나도 냉랭했습니다. 캐나다 삶은 충분히 경험했으니 그만 접고 들어와 본격적으로 목회를 준비하라는 충고, 저의 안녕은 그리 궁금하지 않은 채 제 목회 가능성의 여부만을 확인한 전화, 항상 제게 ‘기술은 가둬놓고 패면 는다’라는 말로 먼저 인품과 인격과 다양한 시선을 만들라고 조언했던 목사님의 충격적인 질문 등 모두 이제는 무엇이 되었든 그만 접어두고 빨리 목회를 준비하라는 불편한 말들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반복됐던 통화와 조언에 훗날 목회를 하게 되더라도 먼저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제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서른과 스물아홉의 선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제가 아직도 철이 없어 이러는 것인지 최근 이 일로 무척 길어진 새벽을 보내고 있습니다.


 본질(本質)과 형식(形式)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먼저인지에 대한 논의에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논의로만 남는 이유가 있겠죠. 본질을 담고 있는 내용이 형식을 따라가지 못하면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이 얕고 가벼워 보일 수 있고, 반대로 형식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내용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면 그 내용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험악(險惡)해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춤과 춤추는 사람을 어떻게 떼어놓을 수 있는가’라는 말이 있듯이 본(本)과 형(形)은 하나이겠거니와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화두가 되는 것은 본(本)과 형(形)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껏 형(形)보다는 본(本)을 더 기르고 다듬고 수양(修養)하는데 힘을 쏟은 부류겠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먼저 되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죠. 그것을 풍기고 나눌 수 있는 다양한 형(形)의 조건은 그다음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형식의 중요성을 일생 뼈저리게 경험한 저였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가장 몸으로 느꼈던 저는 사실 형식이 만들어진 다음에 내용을 채우게 된 경우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경우를 제가 경험했던 셈이죠. 글도 쓰다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제가 글을 쓰는 것인지 제가 쓰는 글이 저를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혼동(混同)입니다. 제 안에 있는 것을 쓴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글을 쓰다 보면 제 안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글이 저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저는 지금 이 시기에 본(本)과 형(形) 중 무엇에 더욱 힘을 써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형(形)을 구축하면서 그에 따른 내용을 채워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껏 해왔듯 본(本)을 따라 자연스럽게 맺혀질 작은 열매들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생각보다 어려운 갈림길에 서 있는 요즘입니다.


부풀어 생긴 ‘속이 빈 방울’


    하지만 제 아직 아무리 모르긴 몰라도 오늘을 살아가면서 자주 볼 수 있는 사회 모습은 심히 형(形)적인 것에만 치중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물론 그 형(形) 안에 본(本)과 그 내용이 존재하겠습니다만, 형(形)적인 부분이 본(本)에 비해 너무 부풀어 있어 그에 따른 문제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아픈 현실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故) 신영복 선생님은 형(形)이 본(本)에 비해 너무 부풀어 있는 이런 오늘날의 사회를 ‘상품화된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의 모든 것은 ‘거래’를 목적으로 팔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상품의 가치와 목적은 오로지 팔리는 것에 있죠. 오늘날의 물건이나 지식, 하물며 언어나 관계까지 교환가치의 이윤을 따지지 않는 것이 없고, 그러면서 자연히 중요해진 부분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떻게 보이는가’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형(形)적인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이는 것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빠르게 욕망을 자극하고 빠르게 갈증을 해소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본질적인 것은 스스로 드러나기도 어려울뿐더러 드러나는 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거래와 이윤에 있어서 그리 우선되는 사항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오늘날의 사회는 그에 따라 너나 나나 모든 것이 본(本)보다는 무조건 형(形)적인 부분에 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요즘 CF 광고만 봐도 30초 동안 그 자동차의 우수함이나 질(質)적인 부분을 나열하는 것보다 유명 연예인이 30초 동안 멋지게 그 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대중에게 더욱 효과적입니다. 겉으로 빠르고 화려하게 나타나는 것이 안에서 우직하게 존재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더욱 매혹적이죠. 그 대상이 소비자라면 두말할 것이 없고요.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거래와 이윤을 넘어 관계와 신뢰의 부분까지 넘어오면서 발생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상품의 형식만을 차리고, 자신의 겉면만을 꾸미고, 겉사람의 관계만을 지속합니다. 일을 대할 때도 결국 보이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갖습니다. 때문에 막상 상품의 뚜껑을 열었을 때 배신감을 느끼고, 겉사람들 간의 교류에는 불신만이 쌓이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살아감에도 속사람 간의 진실된 관계 부재(不在)를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일을 대할 때도 일에 대한 소명 의식이나 자아실현보다는 외적으로 보이고 나타나는 것들에 관심을 두죠. 결국 커피를 만드는 일이나 어떤 상품을 만드는 일이나 미래를 바라보며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나 환자를 보살피는 일이나 끝에는 모두 ‘사람’과 ‘생명’을 대하는 일일진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본(本)은 경시한 채, 보이고 나타나는 형(形)만을 추구하니 오늘날의 사람과 사람 간의 사이가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또한 형(形)만을 가꾸고 형(形)만을 내보이는 관계 속에서 진실된 본(本)끼리의 깊은 만남이 쉽지 않음 역시 오늘날의 사람과 사람 간의 사이를 더욱 벌어지게 하는 것이겠지요. ‘생명’과 ‘사랑’을 대하는 데 있어서 형(形)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결국 오늘날의 차갑고 쓸쓸한 인간사회를 만든 것은 본(本)의 부재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생명이 건강히 자라는 속도


    한국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했던 제가 지금은 캐나다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과 장소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심지어 시간도 다른 이곳에서 저는 조금은 다르게 ‘생명’과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웁니다. 선배들이 보기엔 지금 저의 시간이 소히 알맹이 없는 시간으로 보이겠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 이 시간이 저의 알맹이를 더욱 다져가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땅을 깊게 파기 위해서는 그만큼 넓게 파야하는 법이지요. 저는 제가 정한 길을 조금이라도 더 깊게 가기 위하여 지금 조금이라도 더 넓게 파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깊어진 본(本)이 비로소 그에 맞는 형(形)을 낼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방법으로 나타내든지 간에 ‘생명’으로 향하는 일에 본(本)의 덕목들은 필수적이니까요. 사람에 움직이고, 진심에 움직이고, 사랑에 움직이는 ‘생명’은 부풀린 허영에 쉽사리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본(本)의 덕목을 더 가꾸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시절 제가 참 존경하는 교수님이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천천히 자란다.’ 또 생명이 있는 것이 급격하게 자란다면, 그것이 잘못 것이라고도 덧붙이셨죠. 그러면서 우리 모두 나무의 속도만큼만, 자연의 속도만큼만, 생명의 속도만큼만 꾸준히 자라기를 항상 바라셨습니다. 정말 교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생명은 ‘생명의 속도’가 있습니다. 때문에 혹 보기에 더디다고 너무 성급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이고, 그에 따라 부수적인 많은 것을 재촉하는 세상이지만, 저는 저라는 생명에게 ‘생명의 속도’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저라는 생명의 나무를 ‘좋은 나무’로 잘 기른 후에 자연스레 맺혀지는 ‘좋은 열매’로 많은 이들에게 ‘쉼’과 ‘사랑’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그게 제 힘으로 될련 지도 모르겠고, 그 열매가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게 다입니다. 예, 그게 다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그런 ‘숲’을 이루어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 숲은 분명 누구나 와서 평안히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숲'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7:17-18)


2024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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