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와 같지 않아
살 것이 있어서 마트엘 좀 다녀오는 길입니다. 빨리 갔다 올 생각으로 길을 나섰지만, 캐나다의 햇살이 사람을 참 차분하게 만들어 주더군요. 그래서 그 기분을 따라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추어 보았습니다. 평소 제 걸음이 빠르다고 느끼지는 못했는데, 주변에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니 제 걸음이 그들과는 확연히 다를 정도로 빨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4km가 넘는 거리를 30분 안팎으로 걸어 출퇴근했었는데 이것만 봐도 이곳에서의 제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선 나름 천천히 걸으며 살아왔던 제가 도리어 캐나다에 와서 빠르게 걸으며 삽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이상하네요.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춰보니 사람이 생각났고, 연락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기에 별 내용 없지만, 별 내용 없기에 따뜻한 안부 연락을 주변에 돌렸습니다.
빨리 걷게 된 이유
한국에서부터 한 달에 하나씩은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은 것이기에 굳이 캐나다 얘기를 자주 하고 싶진 않지만, 제가 이곳에 발붙여 지내고 있는 지라 이는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캐나다에서의 삶이 지금의 저를 보여주니 말입니다. 캐나다에서 생각하고 기대했던 삶을 살고 있느냐는 물음에 저는 우선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느냐는 연락이 올 때면 대답하기 참 곤란합니다. 썩 잘 지내고 있지 않으나, 제 선택에 있어서 약한 소리 하는 게 그리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 캐나다에서 좋은 순간들도 있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걱정을 삼킨 시간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이전에 한국에서 형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 주었던 ‘살기 좋은 캐나다 삶’과 제가 사는 캐나다 삶은 많이 달랐습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발버둥 칠수록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기준을 낮춰봐도 그것마저 할 수 없음을 이곳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형이 이야기해 주었던 ‘살기 좋은 캐나다 삶’을 저는 같은 캐나다에서 부러워하고, 바라고, ‘나는 왜 저리 안될까’ 자책하며 무겁게 하루하루를 보낸 시간이 저의 캐나다 삶에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보다는 덜 무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려운 건 피차 마찬가지겠지만, 어쩌면 제가 하루하루 더 무겁게 살고 있는 이유는 형이 살았던 그 ‘살기 좋은 캐나다 삶’을 마치 저의 삶의 지도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형처럼 현지 잡을 구할 수 있고, 저도 형처럼 꼭 현지 잡을 구해야 하고, 발에 불나도록 이력서를 돌리다 보면 한 달 반 후에는 정착할 것이고, 이력서 50개 돌렸을 쯤에는 두 곳에서 합격 연락이 올 것이고, 그 이후에는 현지 친구들과 아름다운 삶을 공유하며 지낼 것이라는 기대 등 행복하게만 들렸던 형의 캐나다 삶이 저의 캐나다 삶이 되기를 바라면서 저는 캐나다에 오자마자 저의 캐나다 삶을 형의 걸음으로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형처럼 살지 못할 때마다 좌절하게 되고, 형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할 때마다 쓰러지게 되고, 형이 이루었던 그 기간을 넘길 때마다 저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패배감과 열등감들을 느낄 때마다 ‘나도 형처럼 해야 한다’, ‘나도 형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형의 걸음을 따라잡기 바빴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되어도 나일 수 없는 그 걸음을 아주 열심히도 말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라고 말했다지요. 현실의 문제가 우리네 삶을 참 무겁게 하지만, 현실의 문제만큼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이 우리네 삶을 더욱더 무겁게 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못지않게 나 스스로가 나의 삶을 무겁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마음만 버려도 삶이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내 걸음으로 걷는 발걸음이 무거울 리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 아침 공기가 예상보다 더 상쾌해서 놀랄 수도 있을 겁니다.
씨를 담는 그릇
대학 시절 제 주변엔 참 대단했던 친구가 많았습니다. 한 친구는 논문상도 받을 정도로 논문도 열심히 준비하고, 지방에 있는 큰 교회에 주마다 오가며 각종 행사를 포함한 사역도 열심히 하고, 학교 기숙사 행정 조교도 하고, 개인적으로 블로그도 운영하는 친구입니다. 또 제 주변에 대단한 친구라 하면 일 년간 기숙사에서 동거동락했던 제 방 친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학업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소 일도 하고, 조교 일도 하고, 단연 사역도 하고, 유학 준비에, 사진 강의에, 잡지에까지 글을 발간하는 친구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 친구 모두 흔히 말하는 대단한 성과를 내는 친구들입니다. 반면에 저는 학업과 사역만 해도 항상 널브러지기 일쑤였습니다. 맡은 것에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지만, 대단한 성과를 냈느냐는 또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제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그 이상 일을 늘렸다간 입술의 포진이며 몸살이며 제 몸이 견디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일들을 뛰어나게 소화할 수 있는 친구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들은 대개 ‘약한 소리 하지 마라’, ‘너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소리를 제게 종종 건네기도 했지만, 저는 예전부터 저의 그릇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맡은 일에 100% 에너지를 쓰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일을 가질 수 없는 저였죠. 기껏 더해봤자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정도일까요.
그래서 저는 저의 그릇을 알게 된 후로부터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참 싫었습니다. 제가 뿌릴 수 있는 양 안에서 저 나름의 열심을 다하고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애초에 저는 뿌림이 적으니 거둠도 적고, 무엇보다 보이는 거둠이 적으니 별로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뿌리고 있지도 않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많이 뿌릴 수 있는 그릇을 가진 그들은 많이, 그리고 열심히 뿌린 만큼 엄청난 성과들을 거뒀고, 많이 뿌리지 못하는 그릇을 가진 저는 딱 저만큼의 성과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과만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시선에서 저에게나 남에게나 그리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는 여러 이유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보다는 야곱을 이야기하며 ‘부당함에 은혜를’이라는 말을 더욱더 되새겼던 것 같습니다. 분명 저의 그릇이, 저의 뿌림이 무엇인가를 더 크게 거두기에는 부당하겠지만, 어쩌면 ‘은혜’라는 말이 부당함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생긴 대로 걷기
캐나다에 와서 형의 걸음을 나의 걸음으로 삼아 열심히 달려보았지만, 제가 얻게 되는 건 역시나 포진과 몸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저만의 모습도 점차 잃어가고 있었죠. 형만큼 튼튼하지도 않은 제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2-3시간 동안 매일 20km를 걷다 보니 수술했던 양쪽 발목과 십자인대도 아파오고, 형이 현지 잡을 구했던 한 달 반이 지났지만 그 어떤 성과도 보지 못한 제 삶에 제 마음도 찢어지도록 아파왔습니다. 아니 어쩌면 캐나다에 도착해서 비자를 받고, 집을 구하는 과정부터 어쩜 이렇게 형과 같은 부분이 단 하나도 없는지 싶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더욱더 제 그릇을 넘어 형처럼 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건만, 역시나 이 걸음은 제 걸음은 아님을 제 몸과 마음이 보여줬습니다.
지금은 포진과 몸살을 잘 견뎌 보낸 후 아픈 십자인대와 발목이 더 상하진 않을까 노심초사 몸 컨디션을 조절해 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참 미련하기 쓸데없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배웁니다. 아니 어쩌면 여기에 와서야 이렇게 더 배웁니다. 이제야 좀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되고, 이제야 이곳에서 놀이를 찾고자 하는 여유가 생기고, 이제야 제 삶에 새로운 활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다시 캐나다 생활이 기대가 되고, 일상을 더욱더 성실하게 살 힘이 생깁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니 그저 땅에 묻어놓고 태평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각자의 걸음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진 달란트가 두 개라면, 저는 두 개의 달란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제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만큼의 성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마25:22-23)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누군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지고 보았을 때 모두 외부에서 주어진 가능성, 기회, 행운, 재능 혹은 천분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흔히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서 그리 주눅 들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혹 나보다 부족한 사람 앞에서 오만할 것도 없습니다. 누구든 처음부터 제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 땅에 올 때도 우리가 선택해서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의 존재 자체는 누구와 치열하게 비교하고 경쟁할 부분도 아닙니다. 오늘날 80억 명의 모든 사람의 얼굴이 하나같이 다 다르듯이 우리 모두는 다 각기 다른 그릇들(딤후2:20-21)일뿐입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신비에 우리의 걸음도 맞춰 조율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긴 대로 논다’는 옛말을 ‘생긴 대로 걷는다’는 말로 바꿔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걸음으로 자신의 삶을 걷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것이 야속하게도 자꾸만 나를 나만의 걸음에서 멀어 뜨리니 말입니다. 때로는 끝나가는 기회와 신호에 뛸 때도 있어야 하겠지만, 부디 자신의 걸음을 고수하기 바랍니다. 삶을 계속 뛰어다닐 순 없습니다. 내 삶을 남의 걸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현실은 우리를 일렬로 세워놓고 한 레일 안에서 앞서고 뒤서기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 각기 다른 자신만의 레일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른 지향으로만 나아가면 됩니다. 내 레일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겠다고 내 레일에서 이탈하는 순간 ‘나’의 경주는 끝나는 것입니다. 각자의 레일에서 각자의 경주를 뛰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경주 가운데, 각자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 가운데 우리 하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게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5:22-23)
2023년 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