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상득 Sep 05. 2021

길 찾기 글쓰기

구조의 기술

“한 편의 글은 어딘가에서 출발하여, 어딘가로 가서, 도달한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을 할까? 반박의 여지가 없기를 바라는 구조를 세움으로써 이 일을 한다.”

– 존 맥피



글쓰기는 길 찾기와 닮았습니다. 길 찾기에 출발지와 도착지가 있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요. 잘 모르는 곳을 찾아갈 때 저는 포털의 길 찾기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예를 들면 서울 남부터미널을 가야 할 경우 출발지에 집 주소를, 도착지에 남부터미널을 넣고 검색하면 대중교통, 자동차, 도보 등을 이용하는 다양한 경로가 나오지요. 대중교통도 버스나 지하철로만 가는 경우와 두 가지를 모두 이용하는 경우 그리고 그것들을 조합한 최적, 최소 시간, 최소 환승, 최소 도보 등의 추천 경로가 있어요. 그 다양한 경우들 중 저의 사정과 기호에 맞는 경로를 선택합니다. 그러면 이제 출발하는 일만 남지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기 전에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의 경로를 대략 그려봅니다. 여러 가지 방법, 경로가 있겠지요. 그중에서 글감에 어울리고, 또 글 쓰는 이의 역량과 기호에 맞는 경로를 고르면 됩니다. 경로를 표시할 때 저는 주로 숫자와 낱말을 함께 사용하는 편이지만, 각자 자신에게 편리한 방법을 이용하면 그만이겠죠. 막상 실제로 글을 써보면 구상했던 경로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애초에 그려둔 경로가 있다면 글쓰기에 착수할 수 있고, 얼마간 헤매더라도 아주 길을 잃지는 않고 결말에 이르게 되겠지요.   


Photo by Jay Heike on Unsplash



논픽션의 대가, 존 맥피는 고등학교 시절 올리브 매키라는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그 선생님의 작문 숙제는 이례적이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 말 프린스턴고등학교에 다닌 첫 3년간, 나는 올리브 매키라는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웠다. 이 선생님이 임의로 택해서 우리에게 내준 쓰기 숙제와 읽기 숙제의 비율은 돌이켜보면 이례적이었고, 졸업반 때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의 수업 계획서와는 확연히 달랐다. 매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일주일에 세 편씩 글을 쓰게 했다. 그중에 이를 테면 추수감사절이 낀 주도 있었으니까 정확히 매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3년간 거의 매주 세 편의 글을 썼다. 주제는 뭘 쓰든 자유였지만, 선생님이 처음에 짜라고 일러준 글의 구조적 윤곽을 모든 작문에 첨부해야 했다. 형식은 상관없었다. 로마 숫자 I, II, III을 붙이는 식으로 해도 되고, 화살표와 막대기 사람을 그려넣은 구불구불한 낙서도 괜찮았다. 요는 본격적으로 글의 문장과 단락을 쓰기 전에 우선 어떤 청사진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존 맥피, <네 번째 원고>, 유나영 옮김, 글항아리



매키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글은 아니지만 ‘4월의 크리스마스’라는 글을 쓰기 전에 제가 그려본 길 찾기 경로, 구조적 윤곽은 이랬습니다.


1 – 딸

2 – 어머니

3 – 여자 친구

6 – 아내






4월의 크리스마스



4월 어느 날이었다. 전날 밤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딸이 다리에 매달린다. “회사 가지 마. 나랑 같이 놀아요.” 딸은 아프다. 전에도 가끔 이런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어리광이 더 심해졌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딸 옆에 앉는다. “그럴까? 연차 내고 하루 쉬어야겠네.” 아파트 입구에 핀 생강나무 꽃처럼 딸이 웃는다. “정말?” “그래. 이참에 아예 회사 그만두고 계속 놀지 뭐. 월급을 못 받으면 어때? 밥을 못 먹어도 옷을 못 입어도 돈이 하나도 없어도 물건을 살 수 없어도 이렇게 같이 놀면 좋잖아.” 그제야 내 속셈을 알아차린 딸이 눈을 흘기며 나를 잡은 손을 놓는다. 아파트 앞 화단의 생강나무는 밤새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아픈 딸을 두고 출근하는 마음이 꽃잎 진 나뭇가지 같다.



오전 회의 중에 문자 메시지가 온다. 어머니다. “몸은 괜찮은가요? 아침 굶지 말고 챙겨 먹어요.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사랑해.” 어머니의 문자는 마치 손으로 직접 종이에 쓴 편지 같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지키려 한다. 어머니는 아프다. 아픈 어머니는 늘 멀쩡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다. 환절기인데 천식은 심하지 않은지, 황사가 온다던데 마스크는 갖고 다니는지. 어머니의 일은 종일 자식을 근심하는 일이다. 근심을 끓이느라 어머니는 늘 속이 편치 않다. 소화가 잘 안 되어 아침을 제대로 못 먹는 어머니는 밥이든 죽이든 빵과 커피든 꼬박꼬박 챙겨 먹는 아들의 아침을 염려한다. 나는 퉁명스러운 답 문자를 보낸다. “지금 회의 중입니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퇴근 무렵 여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늘 우리 만나요. 사무실 앞으로 갈게요. 얼굴이 야윈 여자 친구는 나를 보자 환하게 웃는다. 내 손을 잡는다. 이 사람은 내 사람입니다라는 듯. 여자 친구는 걸을 때 조금씩 절룩거린다. 나 예뻐요? 응, 예쁘네. 거짓말. 화장도 안 했는데. 화장 안 해도 예뻐. 강남에는 정말 예쁜 여자들이 많네요. 다 성형 수술한 얼굴들인걸. 예쁘면 그만이죠. 나도 수술해요? 뭐 나보고 수술비 내달라고만 안 하면야. 계단을 오르내릴 때 여자 친구는 내 손을 더 꼭 쥔다. 나 모자 하나 사 줘요. 직접 골라주면 좋겠는데. 그럴까? 여자 친구는 요즘 들어 부쩍 머리가 자꾸 빠진다며 모자를 이리저리 써 본다. 예뻐요? 잘 어울리네. 나도 맘에 들어요. 늦은 저녁 겸해서 우리는 막걸리와 전을 파는 식당으로 간다. 아프기 전에는 그도 술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안 마신다. 그래도 분위기는 내야 한다며 술 한 잔을 받는다. 여자 친구는 기분이 좋은지 모자를 쓴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나 예뻐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뇨, 난 거짓말이 좋아요. 여자 친구는 생강나무 꽃처럼 웃는다.



밤중에 잠깐 잠을 깼다.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아내는 통증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내는 발목 부위를 손으로 탁탁 때리는 중이다. “왜 아파서 그래?” “괜찮아. 피곤할 텐데 들어가 자요.” 나는 아내 발목을 주무른다. 언제부터였는지 베란다 창 밖에는 눈발이 날린다. 아내가 생강나무 꽃처럼 웃는다. 그러니까 딸이자, 어머니이자, 여자 친구인 아내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4월의 크리스마스라는 글의  찾기, 구조는 “1 – , 2 – 어머니, 3 – 여자 친구, 6 – 아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문단으로 만들어졌어요. 아내 앞의 숫자가 4 아니고 6 이유는 딸과 어머니와 여자 친구가 모두 아내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조의 핵심인 셈이지요. 일종의 반전이었으니까요.



글쓰기에 구조가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노골적이거나 억지스러우면 안 된다고 맥피는 당부합니다. “독자들이 구조를 눈치채게끔해선 안 된다. 구조는 사람의 외양을 보고 그의 골격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만 눈에 보여야 한다. ...... 구조에 글감을 억지로 끼워맞추면 안 된다는 얘기다. 구조는 글감 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끝내주는 글쓰기'에 덧붙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