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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득 Oct 03. 2021

글쓰기 준비물, 여행자의 돌

첫 번째 문장 쓰기의 기술

오늘은 글쓰기의 준비물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글쓰기에는 별도의 준비물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창작 작업과 달리 글쓰기는 그저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니까요. 요즘은 컴퓨터나 노트북 혹은 휴대전화기를 활용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을 활용하여 얼마든지 창작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스티븐 킹은 글쓰기에도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연장통이라고 부르지요. 목수인, 그의 외할아버지에겐 각종 연장들을 넣어 다니는 연장통이 있었답니다. 나중에는 오런 이모부가 물려받았다는 그것은 내부가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망치, 톱, 펜치처럼 자주 쓰는 연장은 맨 위층에 있고 다음 층에는 드라이버와 드릴과 송곳들이 있었다고 하지요. 오런 이모부는 방충망을 고치는 간단한 작업, 그러니까 드라이버 하나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업을 할 때도 그 무거운 연장통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일단 현장에 와봐야 무엇이 또 필요한지 알 수 있으니 연장은 전부 다 갖고 다니는 게 좋다고 하면서 말이죠. 



연장통은 글쓰기에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고 스티븐 킹은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글쓰기에서도 자기가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려면 연장들을 골고루 갖춰놓고 그 연장통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팔심을 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설령 힘겨운 일이 생기더라도 김이 빠지지 않고, 냉큼 필요한 연장을 집어들고 일을 시작할 수 있다.”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김진준 옮김, 김영사



그러면서 그는 연장통의 맨 위칸에는 글쓰기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낱말들, 즉 어휘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어휘력을 키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이지요. 낱말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므로 가장 먼저 떠오른 낱말을, 그것이 생생하고 상황에 적합한 것이라면 그저 그 낱말을 쓰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어휘와 함께 맨 위칸에는 최소한의 문법이 들어가고, 그다음 칸에는 형식과 문체의 여러 요소들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만일 저에게 글쓰기 연장통이 있다면 저는 맨 위칸에 ‘여행자의 돌’을 넣고 싶습니다. ‘여행자의 돌’은 첫 번째 쓰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글쓰기란 한마디로 하면 문장을 쓰는 일입니다. 첫 번째 문장을 쓰고 두 번째 문장을 쓰고 그렇게 계속 문장을 써 내려가는 일이죠. 마지막 문장을 쓸 때까지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첫 번째 문장을 써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매번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첫 번째 문장을 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여행자의 돌’은 이때 필요합니다.   



‘여행자의 돌’을 가지고 있으면 글쓰기 작업을 일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자의 돌’은 첫 번째 쓰는 문장이니까요. 첫 번째 쓰는 문장이 첫 문장은 아닙니다. 첫 문장은 퇴고 때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두 번째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이 첫 문장의 자리로 올 수도 있겠지요. 아예 첫 문장을 새롭게 쓸 수도 있습니다. ‘여행자의 돌’은 첫 문장이 아니라 첫 번째 쓰는 문장입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첫 번째 문장. 



아마 기억하겠지요. ‘여행자의 돌’ 이야기를. 저도 순전히 부실한 기억에 의존하는 거라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대략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행자의 배는 항상 고픈 법이죠. 어느 저녁 마을에 온 여행자가 먹을 것을 구하는데 마을 사람들 누구도 선뜻 음식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러자 여행자는 집집마다 다니며 자신에게 맛있는 수프를 끓일 수 있는 신비한 돌이 있다면서 단지 큰 냄비만 빌려주면 수프를 끓여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누군가 큰 냄비를 내어줍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여행자는 큰 냄비에 물을 붓고 자신이 갖고 있던 돌 하나를 넣은 다음 끓입니다. 냄비 뚜껑이 들썩이자 그는 한입 맛을 보고는 “그래, 이 맛이야. 수프가 제대로 되어가는군. 그런데 조금 싱거워. 소금을 조금만 넣으면 좋겠는데”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누군가 소금을 갖다 줍니다. 다음에는 양파를, 감자를, 마늘을, 고기를 원하고 그때마다 누군가 그것을 여행자에게 가져다주고.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내놓은 재료들로 정말 맛있는 수프가 만들어지는 거죠. “세상에 정말 수프를 끓이는 신기한 돌이 있군요”라고 감탄하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맛있게 나눠 먹은 수프가.



이 이야기에서 수프를 만든 건 무엇일까요? 물론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내놓은 재료들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여행자의 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여행자의 돌이 없었다면 마을 사람의 재료들도 나오지 않았을 테고 끝내 맛있는 수프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테니까요.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쓰고 싶은데 도무지 한 문장도 쓸 수 없을 때가 있지요. 혹은 무엇을 써야 좋을지 몰라 막막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 글의 냄비 속에 집어넣을 ‘여행자의 돌’, 첫 번째 쓰는 문장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됩니다. 그런 여행자의 돌 두 가지만 소개할 게요. 



언젠가 앞에 썼던 ‘사랑하는 사람을 썼다 지우기’라는 글에서 인용한 존 맥피의 ‘사랑하는 엄마에게’는 유용한 ‘여행자의 돌’이지요. 글쓰기의 벽에 부딪혀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때, 그때 ‘사랑하는 엄마에게’라고 첫 번째 문장을 쓰고,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글을 쓰면 어떻게든 글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글의 주제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물론 다 쓴 다음에는 ‘여행자의 돌’은 글의 냄비에서 꺼내어 지우면 되겠지요.  



오은 시인의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역시 아주 유용한 ‘여행자의 돌’입니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분을 비롯해 글쓰기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저 ‘한번’에는 내가 여태 잊지 않은 공간, 심신에 새겨진 시간, 그 안에서 몸소 겪은 일이 다 들어 있다. 글을 써보면 알게 된다. 무수히 많은 일들 중 하나였던 ‘이런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든 특별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일이 나의 일상을, 나아가 나의 인생을 구성한다.”


-      오은, <다독임>, 난다



정말 멋진 ‘여행자의 돌’이지요. 우리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응용할 수도 있겠지요. 한번은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었다. 한번은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등등. 



 어떤 ‘여행자의 돌’은 굳이 글의 냄비에서 꺼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가 그렇지요. 위에 인용한 글의 첫 문장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입니다. 시인은 글을 다 쓴 다음에도 ‘여행자의 돌’을 지우지 않습니다. 지우기는커녕 오히려 그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고 변주하며 아름다운 운율을 만들지요.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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