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내가 나태한 꼴은 볼 수 없어서, 조금의 시간적 여유만 생기면 그걸 못 참고 뭘 배우러 다녀야 했지만, 우아해 보여서였든가...... 갑자기무슨 생각에 플루트를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주일에 한 번, 집 근처에서 30분의 레슨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박사과정이 어찌 그런 여유를 부린단 말이더냐! 갑자기 바빠진 실험 스케줄로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끝내고 말았다.
연습할 시간도 마땅치 않아, 호흡과 2 옥타브의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를 겨우 배우고 만 플루트지만, 그래도 내게 약간의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덕에 2옥타브 내에서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을 노래할 수는있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 플루트를 접할 시간은 없었고, 그렇게 내 플루트는 녹이 슨 채로 잊혀갔다.
녹슨 부분은 악기상에 세척만 맡기면 괜찮아지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무지했던 내가 첫 플루트를 그렇게 버렸음에도, 집에서 놀고 있는 플루트가 또 생겼다. 플루트를 잠시 배운 아이가 내팽겨 둔 것이었다.
이번 플루트는 녹도 슬지 않고, 외관상으로 쓸 만해 보여서 버리기는 좀 아까웠다.
'옛날에 플루트 잠시 배웠으니까 배우기 쉽겠지? 저 플루트 내가 써볼까?'
딸아이의 디지털 드로잉 수업을 알아보는 중에 알게 된,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플루트 수업을 해보기로 마음먹고 다시 플루트를 꺼냈다.
과정은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3개 과정을 함께 할 경우 할인 폭이 커져 96개 레슨을 1년에 마쳐야 하는 통합 과정을 신청하였다. ‘그래도 수십(?) 년 전에 불어 보았으니 초급 정도는 금방 끝내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하하, 그런데 이게 웬일이니. 쉽게 생각한 플루트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운지법도 기억이 나지 않아 운지법부터 다시 익혀야 했다. 3옥타브와 샾#, 플랫 b의 운지법은 진도에 따라 차츰 익힐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1년 내에 고급과정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손에 익힐 틈도 없이 잠깐 플루트를 구경만 해놓고는 정말 염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몸으로 익힌 것들은 몸이 기억한다고 누가 그래!’라고 마음속으로 욕을 해가며 매일 연습했다.
과정이 진행될수록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든 초급을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급은 2개월 내로, 중급은 4개월 내로 끝내고 고급으로 들어가면 1년 내에 완강할 수 있겠다 계획으로 열심히 했다. 1 과를 배울 때마다 연주곡과 연습곡을 동영상으로 찍어 제출해야 하는데, 삑사리가 나거나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시 찍고 다시 찍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딸리니 연습할수록 연주가 엉망이 되기도 했다. 초보자인 나는 손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손가락이 아프고 (플루트를 놓칠까봐 힘을 너무 준 탓에 새끼 손가락이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담이 결려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자기 스케줄에 맞춰 진도를 나가는 온라인 수업이다 보니, 나 같이 과제를 열심히 제출하는 사람은 없었나 보다. 선생님은 나를 모범생이라고 부르시며 다른 악기를 전공했느냐고 참 잘한다고 칭찬해주시기도 하셨다.
초급을 두 달 만에 끝내고 중급 과정을 반 정도 진행했을 때,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글 쓰는 시간과 책 읽는 시간이 늘자, 플루트를 연습할 시간이 줄었다.
1주에 5개씩 제출하던 과제가 2개로 줄었고, 과정이 진행되면서 점점 연주곡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길어지기까지 하여 어떤 주엔 1개를 겨우 제출하기도 하였다. 요즘 선생님은 내가 과제를 제출할 때마다 오랜만이라고 말씀하신다.
중급 진도를 절반 정도 진행하였을 때였던가, 어느 날은 연습하는데 소리가 너무 안 나오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 중급을 계속하다가는 진도를 따라간다 해도 연주 상태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을게 분명했다. 연주곡들이 어려워지고 길어지고 있어서 한 곡을 완곡할 때마다 지치는 게 느껴질 정도인데,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질 않으니 잠시 휴강하고 연습을 더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코로나 확진 이후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괜히 호흡이 더 딸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선생님, 저는 가리볼디*가 싫어요!"
*플루트의 초급에서 중급으로 넘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가리볼디 에튀드를 배우는데,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곡들이 많다.
자세가 잘못되었나, 플루트 조립을 잘못했나, 계속 찾아보고 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태 때문에, 연습하던 곡을 내버려 두고 초급 책을 찾아 앞에서부터 차례로 연주해보기 시작했다.
'어! 나 이거 과제 제출할 때 그렇게 힘들게 불던 건데 왜 이렇게 쉽지?'
그랬다. 매일 2시간씩 플루트를 부는 나를 보며 남편이 전공할 거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완벽하진 않아도 꾸준히 진도를 나가면서 점점 어려운 것들을 배우는 동안 앞에서 배웠던 것들을 의도치 않게 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비하면 몇 배로 늘어난 곡 길이가 연주하기 힘들다고, 온몸에 힘을 꽉 주고 불어야만 소리가 나는 고음 파트가 어렵다고 진도를 나가지 않고 주저주저하고 있었다면, 붙잡고 있던 그 과정만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완벽하지 않아도 다음 과정을 진행하면서 보완된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1년이 지나도 고급과정의 문턱을 밟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호흡과 소리가 제대로 난다는 전제입니다. 사실 진도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기에 충실한 제대로 된 소리 내기이니까요. 그리고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 거니까, 음악 특히 플루트를 제대로 하시는 분들께서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 해 본 완벽주의 성향 테스트에서 나는 ‘강철멘탈 성장지향형 완벽주의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네 명의 완벽주의자> (이동귀, 손하림, 김서영, 흐름출판, 2021)라는 책에 따르면 완벽주의자에는 아래와 같이 제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가장 행복한 완벽주의자로 본다. 이들은 강력한 성취지향적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 멋지고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모험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이 일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어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망설이거나 걱정에 휩싸이지 않는다. 아울러 자신의 모자란 부분에 얽매여 주저하기보다, 부족한 점은 빨리 보완하고 어떤 지점에서 더 나아질 여지가 있는지를 세심하게 찾아내고, 성취를 이루었을 때 누릴 뿌듯함과 여러 현실적인 혜택들을 기대하기 때문에 진행과정에서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대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놀면서 가족과 함께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게 되었다.
'난 색감 위주로 그림을 그려'라는 변명으로 그림을 대충 그리는 것을 보면서, 남편이 50개의 총알을 쏘는 동안 200개의 총알을 쏘는 것을 보면서, 남편과 작업을 할 때 '대충 살자' 주의인 남편이 나보다 훨씬 꼼꼼한 것을 보면서, '나는 완벽주의가 아니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강철멘탈 성장지향형 완벽주의자라니. 저 내용을 보면 내 성격과 잘 맞는 것 같다.
글로 정리된 내용을 보니, '내가 그래서 그렇게 배우는 걸 좋아하고, 빡세게 살면서도 쉽게 만족하고 쉽게 행복해하는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회사 다닐 때 일 못하는 사람을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아이가 모르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이제 플루트를 한 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중급 과정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나는 부족함에 얽매여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앞부분부터 다시 확인하면서 더 나아질 여지가 있는지를 확인했고, 더 나아가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남은 6~7개월간 초급, 중급을 복습하면서 고급 과정을 듣는다면 내 계획대로 완강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제로 제출된 완벽하지 않은 내 연주를 들어주신 선생님께 이제 앞부분은 그때보다는 훨씬 노래답게 연주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란 말씀을 전하고 싶다. 선생님, 그동안 귀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절대로 과제를 대충 하거나 연습을 게을리하지는 않는다. 소리가 잘 안나는 플루트를 자체 수리할 줄도 알게 되었고, 처음 찍은 동영상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짧은 기간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열심히 한 나를 칭찬하고 싶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여,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니 플루트 한 번 배워보지 않으시렵니까?